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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재생사업으로 여유와 배려를 선택한 동네 창신동을 돌아보며아들을 위한 인문학/국내여행 2021. 10. 25. 05:22
1970년대 우리나라이 산업화를 선도한 것은 섬유산업이었다. 동대문의 광장시장과 평화시장은 섬유산업이 활성화되었던 시절 활력이 넘치는 공간이었다. 그러다 생산비를 낮추기 위해 생산과 판매가 분리되면서 작업장들이 동대문 근처 창신동과 숭인동 일대로 옮겨갔다. 1970년대 이후 창신동 일대 소규모 봉제공장 수가 3천여개가 넘었을 정도이다. 하지만 우리나라보다 더 저렴한 생산비를 무기로 내세운 개발도상국들이 부상하면서 대부분의 섬유산업 공장이 해외로 이전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 섬유산업의 산업역군이었던 20대 직공들은 이제 중장년층이 되었고 그들이 나이 들어가는 것처럼 창신동도 쇠락해지기 시작되었다.
도성 동쪽에 위치한 낙산지역은 풍수지리상 청룡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그래서 청룡사라는 이름이 된 거다. 경사지를 오르는 공간에 위치한 청룡사는 고려 태조 왕건이 한양의 지기를 억누르기 위한 비보사찰로 지은 절이다. 결국 고려는 조선 건국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고 한양은 수도가 되었으니 끝까지 비보의 기능을 달성하진 못했던 셈이다. 청룡사는 비탈에 서 있고 거기서 보면 동망봉이 조망된다. 단종의 비였던 정순왕후가 이 절에 머물며 영월쪽을 바라보기 위해 올랐다는 곳이다. 도성 동쪽은 기본적으로 지대가 낮다. 동대문은 사대문 중 유일하게 평지에 만든 문이다, 절의 누각은 우화루라고 아마 눈물이 꽃처럼 흩날리는 모습을 표현한 게 아닌가 싶다. 바로 이곳이 단종과 정순왕후가 이별한 곳이라고 한다
청룡사에서 낙산쪽으로 가다보면 비우당과 자주동샘이 나온다. 정순왕후가 이곳에서 옷감에 자줏물을 들여 시장에 내다 팔았다고 한다. 그래서 동네 이름도 자줏골이라고 한다. 이런 점에서 창신동의 봉제 역사는 상당히 오랜 것이다. 비우당은 이수광이 지봉유설을 쓴 곳이다. 비를 피할 만한 집이란 뜻으로 비가 오면 집안에서 우산을 들고 비를 피했다고 한다
조선시대 한성은 서쪽은 높고 동쪽이 낮아서 성안에 비가 오면 빗물이 동쪽으로 흘렀다. 그래서 동쪽에 홍수도 자주 났고, 홍수가 나면 도성 안의 물을 성 밖으로 배수해야 했으니 동대문쪽에 수문도 만들었다. 동대문 밖은 조선시대에 주로 채소를 재배했던 곳이다. 그래서 왕십리는 무, 훈련원 근처는 배추, 신당동은 미나리 밭이 있었다. 미나리는 물이 많아야 재배하기 좋으니 저지대인 동대문 바깥쪽은 재배 적지이다
창신동에는 절개지가 있어 여기에 집들이 그 위에 있다. 일제 강점기에는 채석장으로 사용되었다. 낙산은 원래 영험한 산신령이 있던 곳이라고 해서 점집도 많았지만 채석장으로 사용되면서 점집은 미아리로 옮겨갔다. 낙산은 서울 중심부에서 가까운 데다 질 좋은 화강암이 충분했기 때문에 일제는 이곳에서 채석해 조선총독부, 한국은행 본점, 경성부청 등을 지었다. 채석한 돌은 당시 전차로 광화문까지 운반했다고 한다. 창신동은 한국전쟁 당시 양구에서 서울로 피난 온 화가 박수근이 그림을 팔아 마련한 첫 서울집이 있던 곳이다. 그는 10년 넘게 창신동에 살면서 화강암에 영감을 얻어 울퉁불퉁한 질감으로 물감을 덕지덕지 바르는 기법을 사용했다고 한다. 채석장은 해방후에도 계속 운영하다가 1960년대 후반에 폐쇄되었다
창신동은 재개발 대신 재생을 택하였다. 도시재생 결과물로 거리의 이름들이라는 프로젝트가 있다. 종로구 창신동지역에서는 주민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옛 봉제산업의 명성을 다시 회복시키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기존 봉제산업을 특화하기 위해 인근 동대문 패션상가와 연계하여 버려진 공간이나 빈집을 청년 디자이너들의 작업공간으로 제공하는 것이다. 한양성곽을 활용한 마을 관광자원 개발도 진행 중이다. 지역의 특성을 도외시하거나 저소득층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여 개발 후 원 거주민의 재정착률이 낮았던 기존 재개발 방식과 달리, 도시재생은 지역의 고유한 특성을 살리면서 지역주민들의 실제적인 삶에도 도움을 주는 방식으로 진행된 것이다
문화예술을 위한 사회적 기업인 아트브릿지로 있다. 부모가 일하는 동안 아이들을 대상으로 연극교육을 하고 있다. 창신동은 우리나라 최초의 전문배우 양성소인 조선배우학교가 있었던 곳이다. 그러니 이 역시 역사와 의미가 있는 공간이다. 세계 유일의 봉제 전용방송도 있다. 봉제작업 중엔 눈엔 뗄 수가 없으니 봉제하는 사람들을 위해 라디오 방송을 하는 것이다. 이 지역에서만 특화된 것이다. 실제 봉제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하루 종일 라디오 방송을 들으며 작업을 한다고 한다. 옆에는 도서관이 있어 지역 어린이와 주민들을 위한 공간이다. 아이를 돌볼 여유가 없는 맞벌이 부모에게는 큰 도움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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