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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유도공원, 영등포공원, 월드컵공원, 올림픽공원의 역사를 알아보면
    아들을 위한 인문학/국내여행 2021. 9. 25. 05:45

    겸재 정선의 선유봉
    양화대교 옆 선유도

    선유도는 신선이 노닐던 섬으로 조선시대에는 선유봉이라고 불리었다. 선유도는 해발 40m정도의 산봉우리로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에서도 선유봉이 등장한다. 이곳은 조선시대 양반들이 한강의 남쪽에서 강북을 조망하기에 적절한 장소였다. 그래서 당시 몇몇 선비들은 이곳에다 별장을 지었다고 한다. 신선이 노닐던 만큼 매력적인 봉우리로 여겨졌다. 1861년 그려진 대동여지도에는 선유봉이라고 이름이 선명하게 나오고 있다. 선유봉에 큰 변화가 일어난 것은 일제강점기때부터다. 1925년 대홍수가 발생하여 물난리에 대비책으로 한강변에 둑을 쌓기 시작했는데 이곳 선유봉에서 골재를 채취했다. 그렇게 시작된 것이 일제가 여의도 비행장을 건설하면서 또 빼어다 쓰고, 해방이후에는 미군정이 도로를 건설하면서 또 깎았다. 1960년대에는 한강의 남북을 연결하는 다리 건설에 쓰였다. 이게 끝이 아니고 1970년대 영등포공단을 비롯해 서울서남부에 인구가 늘어나면서 수돗물을 대는 정수장이 필요했다. 그래서 1978년에 선유도에 정수장을 만들고는 출입을 통제하였다. 그러다가 20년후에 경기도 남양주시에 강북 정수장이 들어서고, 노량진 정수장이 선유 정수장의 기능을 흡수하면서 1999년 정수장 기능이 끝나게 되었고 2002년 월드컵을 앞두고 마침내 생태공원으로 변모했다

     

    영등포공원의 담금솥

    영등포공원의 랜드마크는 공원 중앙에 조형된 담금솥이다. 1933년에 제작되어 1996년까지 맥주 제조용으로 사용한 담금솥이다. 이곳은 맥주를 제조하던 공장터였다. 역사의 흐름 속에 번창하던 맥주공장은 이전하고, 그곳에 소박한 공원이 자리잡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에 맥주가 처음 들어온 것은 1876년 구한말이다. 당연히 당시에는 귀한 술이었다. 1933년에 소화기린맥주 회사가 현재의 영등포공원터에 공장을 지었다. 이후 동양맥주주식회사로 이어지며 오늘날의 OB맥주회사가 되었다. 1930년대 맥주의 가격이 비싸서 맥주 3상자 반이 쌀 1(144kg)값이라고 한다. 그런데 1996년까지 기계가 아니라 담금솥으로 맥주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영등포는 철도 교통의 요지로 과거 서울의 대표적 공업지역이었다. 그러던 것이 1990년대 이르러 서울이 확장되고 땅값이 천정부지로 뛰고 도심 환경에 대한 요구도 높아져 많은 공장들이 지방으로 이전하여 영등포공원에 있던 맥주공장도 1997년 경기도 이천으로 이전하고 담금솥만 남게되었다

     

    월드컵공원은 평화공원,하늘공원,노을공원,난지천공원,난지한강공원으로 구성되어 과거 난지도로 불리던 한강변의 아름다운 모래섬이었다. 난지와 지초가 무성한 향기 나는 곳이었다고 한다. 이중환 <택리지>는 난지도를 굵고 단단한 모래가 다져진 사람이 살기 좋은 터라 기록되어 있다. <대동여지도>에서는 난지도를 중초도로 표기하고 있고 온갖 꽃들이 만발하는 섬이라서 꽃섬이라고 했다. 그런가 하면 오리가 물에 떠 있는 모양이라 하여 오리섬 또는 압도라고 한다. 겨울철이면 철새 수십만 마리가 이곳으로 날아들었다 해서 문도라고도 했다. 특히 하늘공원은 해발고도 98미터에 위치하고 있어서 계단을 끝까지 오르면 멋진 전망을 만날 수 있다. 가까이는 월드컵경기장부터 멀리 남산과 한강, 여의도가 한눈에 조망된다. 이렇게 멋진 전망대는 난지도의 희생을 딛고 탄생한 것이다. 1978년부터 1993년까지 무려 15년 동안이나 서울시민들의 쓰레기를 쌓아 올리던 매립지였다. 탐방소 안내도에는 난지도는 서울이라는 대도시가 뱉어내는 과용과 허영의 산물을 꾸역구역 받아낸 곳이다라고 적혀있다. 이런 난지도가 변신을 시작한 것은 쓰레기 매립지가 김포 수도권 매립지로 이전했기 때문이다

     

    올림픽공원
    몽촌토성과 풍납토성
    백제의 위례성 위치

    올림픽공원은 시간을 기억하는 공간으로 역사의 공간이다. 몽촌토성 일대가 올림픽공원으로 지정되면서 1983년부터 1989년까지 복원발굴 작업이 진행되었다. 움집터, 저장구덩이, 백제토기 등의 유물이 출토되면서 백제 왕성으로 주목된 것이다. 이 공간의 잊혀진 과거를 기억해내기 위해 곰말다리부터 건너보면 좋다. 곰말다리를 건너면 성이 나타난다. 몽촌은 꿈마을이란 뜻이고 꿈마을의 옛말이 곰말이다. 토성 안에 곰말이라는 마을이 있었다. 남북으로 다소 긴 타원형의 자연지형을 그대로 이용해 진흙을 쌓아올린 토성을 만들었다. 방어에 유리하도록 북쪽은 성벽을 더 높이 쌓았고 나무 울타리도 세웠다. 몽촌토성은 백제 초기 4-5세기경 토성으로 추정하고 있다. 해발 30-40미터 내외의 야트막한 구릉을 따라가며 축조된 토성인데 둘레가 약 2.7킬로미터에 달한다. 몽촌토성은 풍납토성과 함께 백제 초기 한성시대 위례성의 일부라고 여겨진다. 풍납토성이 한강변의 평지에 세워져 서해로부터 들어오는 문물을 교류하는 해상교통의 요지로 가능했다면, 몽촌토성은 그 남쪽 구릉지에 방어를 목적으로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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