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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아메리카 시장경제의 기수인 칠레에 대해서아들을 위한 인문학/경제 2025. 8. 26. 02:47
칠레는 유럽이 세계로 진출해 식민지로 삼은 지역에서 부상한 새로운 주자다. 인구 대부분이 메스티소 즉 유럽인과 현지인의 혼혈집단이다 칠레는 라틴아메리카를 대표할 만큼 이 지역에서 가장 성공적인 경제발전을 이룩한 국가다. 브라질과 멕시코에 비해 인구는 적어 1800만명에 불과하고 1인당 국민소득은 1.5만달러 이상으로 멕시코(1만 118달러)나 브라질(8797달러)보다 높다. 브라질이 브릭스라는 새로 떠오르는 강대국 클럽에서 러시아, 인도, 중국,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강대국들과 어깨를 겨누고 있고 멕시코는 미국 및 캐나다와 북미자유무역지대를 형성하고 있지만 칠레만큼 높은 소득 수준을 자랑하지 못하고 있다. 국제연합이 발표하는 인구개발지수에서도 칠레는 우루과이와 함께 라틴아메리카의 선두주자이다. 작지만 부유한 나라 칠레는 남반구의 스위스가 될 수 있었다. 한편 칠레를 지구에서 위치와 모양이 제일 나쁜 나라라고 한다. 칠레는 서쪽으로는 광대한 태평양이 펼쳐져 있고 남쪽으로는 남극해를 발을 담그고 있다. 동쪽은 아메리카의 척추라고 할 수 있는 안데스산맥으로 막혀 있고 북쪽은 아타카마 사막으로 단절되어 있다. 칠레가 접한 태평양은 다른 육지와 멀리 떨어져 있어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스페인의 칠레 지배 칠레는 1540년대 스페인제국이 침공해 식민지로 삼았다. 지형적 이유로 스페인제국이 지배하는 라틴아메리카의 중심지는 중미의 멕시코와 남미 페루였다. 각각 아스테카제국이나 잉카제국이 있었던 곳이다. 그 시기 칠레는 페루의 중심지 라마에 지배받은 처지였다. 칠레는 스페인 제국 주변의 주변이었던 셈이다. 칠레는 남북으로 4200km의 길이를 자랑하면서도 폭은 평균 140km에 불과해 뱀모양을 하고 있다. 뜨거운 열대기후로 가득한 아타카마사막부터 빙하가 지배하는 남극권까지 자연의 다양한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게다가 140km의 짧은 폭 안에 드높은 안데스산맥이 솟아 태평양과 마주하고 있으니, 인구 대국으로 성장하는 데는 명백한 한계가 있다. 칠레는 전체 인구의 1/3인 540만명이 온대기후를 가진 수도 산티아고 부근이다. 식민 시기 칠레는 라틴아메리카의 중심지인 리마에 식량과 생필품을 제공하는 생산기지에 불과하다. 칠레는 리마에 밀을 주로 수출하였고 축산업도 발전했다. 19세기 라틴아메리카의 스페인제국이 붕괴되자 라마는 페루의 수도가 되었고 포토시 광산이 있던 지역은 볼리비아로 독립했다.
미국은 현지 원주민들을 거의 멸종시킨 끝에 백인들만의 나라를 만들었고 결과적으로 평등한 정치사회 질서를 이룰 수 있었다는 것이다. 반면 라틴아메리카는 원주민들이 상당 부분 생존해 사회의 기층을 이루는 한편 사탕수수와 같은 열대작물의 재배를 위해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대량 수입했기 때문에 백인-원주민-흑인으로 이어지는 매우 불평등한 사회구조가 만들어졌다. 라틴아메리카의 문제는 유럽이나 동아시아처럼 경제발전을 강하게 추진할 수 있는 효율적인 국가가 없었다는 것이다. 거시 역사적으로 강한 국가를 만들어내는 것은 전쟁의 경험이나 안보의 위협인데 실제 라틴아메리카는 유럽이나 동아시아와 비교했을 때 19세기 초의 독립정쟁 이후 무척 평화로운 시기를 보냈다. 즉 라틴아메리카는 기존의 불평등한 식민지 사회구조를 재생산하는데만 열중했다는 의미다 한편 아르헨티나는 대국 브라질과 자주 전쟁을 치러야했고, 우루과이는 아르헨티나와 브라질 사이에 끼어 있는 완충국가였다. 칠레 또한 페루 및 볼리비아와 태평양전쟁(1879-1884)을 치렀다. 칠레와 아르헨티나는 스페인제국에서 독립한 이후 사회를 지배하는 엘리트계층이 단결했기 때문에 가장 안정적인 국가체제를 유지해왔다. 칠레의 경제는 수출의 90%를 구리가 차지할 정도로 광산업에 의존하는 전형적인 개발도상국의 구조를 띠고 있었다. 1960-1970년대에 칠레의 인플레이션은 항상 세 자릿수를 기록할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다. 1970년대에는 살바도르 아옌데가 주도하는 사회주의 세력이 선거를 통해 집권에 성공했고 주요 산업의 국영화와 토지 분배정책 등 진보적 정책 프로그램을 실천했다. 이는 농업과 산업 등 모든 분야에서 생산은 축소되었고 인플레이션과 무역적자는 치솟았다.
이에 1973년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장군의 군사정권이다. 당시 군부 세력은 경제에 대해 무지했으므로 시카고 보이스라 불리는 미국 유학파들에게 정책을 맡겼다. 이들의 스승인 프리드먼의 지도로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충격요법이 필요하다는 진단을 내렸다. 모든 가격을 자유화하고 환율을 시장에 맡기는 과격한 정책으로 1973년 6백%가 넘는 인플레이션율은 1980년대 들어 10-20%수준으로 낮아졌다. 1970년대는 아직 케인스주의 경제정책 패러다임이 지배하던 시절이었던 만큼 신자유주의는칠에서 거의 처음 실현하는 셈이었다. 미국의 레이건과 영국의 대처 수상보다 빠르게 칠레는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의 장을 열었던 것이다. 칠레는 400여개에 달하는 공기업을 민영화했다. 토지 분배를 중단하자 농촌에서 새로운 기업형 농장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농장의 규모가 커지면서 자본과 노동이 집중되었고 그러면서 수출을 향한 시도들이 이뤄졌다. 구리에 의존에서 수출구조는 1980년대 다양한 상품의 수출시장이 생기기 시작했다. 칠레의 신자유주의의 정책들이 군부의 권위주의 권력에 힘입어 시민들에게 강요되었던 셈이다. 칠레의 성공은 군부독재 시절보다 민주화 이후에 더 활발하게 기지개를 펴면서 전개되었다 1990년대부터 집권한 민주정부 시기에 인플레이션은 계속해서 하락해 1994년 이후에는 10%를 넘지 않았다. 이에 비해 아르헨티나는 정부 지출이 국내총생산 대비 40% 수준이고 포퓰리즘적 전통을 이어갔다. 결국 칠레가 성공한 이유는 군부독재에 있는 것도 아니고 극단적 신자유주의 정책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더욱 단순한 경제적 지혜 즉 현재보다는 미래를 보고 투자하고 당장 이로운 선택보다는 지금 괴롭더라도 필요한 노력을 지속하는 지혜에 의존한 덕분이다.
100년 전 아르헨티나의 발전에 해운과 냉장기술이 크게 이바지했듯이, 칠레 또한 20세기 후반의 세계화 바람과 운송 분야에서의 혜택을 누리며 발전할 수 있었다. 북반구와 반대되는 계절을 누리는 칠레가 과수농사로 틈새시장을 개척한 덕분이다. 칠레의 몬테스 알파는 와인 브랜드로 프랑스산 와인보다 저렴하면서도 고급술을 마시는 기분을 선사했다. 해안지역에서 양식한 연어는 칠레의 수입원이 되었다. 긴 영토로 인해 사계절을 즐길 수 있어 무궁무진한 관광자원을 선사한다. 칠레는 적극적인 자유무역 정책으로 세계에서 가장 많은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한 국가 중 하나다. 칠레는 실제로 미국, 유럽연합 중국 일본 등 세계 주요 경제 대국과 모두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했는데 한국이 2004년 최초로 체결한 자유무역협정 대상국가이기도 하다. 2010년부터 칠레의 최대 무역 상대는 미국에서 중국으로 바뀌었다. 대서양 시대에 아르헨티나가 빛을 보았다면 태평양 시대에는 칠레가 혜택을 독점하게 될 수도 있다. 한편 세계경제포럼의 보고서에서 칠레는 라틴아메리카에서 높은 경쟁력을 자랑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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