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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시들-39) 호접 / 청개구리 / 자화상아들을 위한 인문학/세계명시 2025. 2. 20. 02:41
< 호접 - 박화목 >
가을 바람이 부니까
호접이 날지 않는다
가을 바람이 해조같이 불어와서
울 안에 코스모스가 구름처럼 쌓였어도
호접 한 마리도 날아오지 않는다
적막만이 가을 해 엷은 볕 아래 졸고
그 날이 저물면 벌레 우는 긴긴 밤을
등피 끄스리는 등잔을 지키고 새우는 것이다
달이 유난하게 밝은 밤
지붕 위에 박이 다른 하나의 달처럼
화안히 떠오르는 밤
담 너머로 박 너머로
지는 잎이 구울러 오면
호접같이 단정한 어느 여인이 찾아올 듯 싶은데.....
싸늘한 가을 바람만이 불어와서
나의 가슴을 싸늘하게 하고
입김도 서리같이 식어 간다
< 청개구리 - 백기만 >
청개구리는 장마 때에 운다. 차디찬 비 맞은
나뭇잎에서 하늘을 원망하듯 치어다보며 목이
터지도록 소리쳐 운다
청개구리는 불효한 자식이었다. 어미의 말을
한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 어미 청개구리가
오늘은 산에 가서 놀아라 하면 그는 물에
가서 놀았고 또 물에 가서 놀아라 하면
그는 기어이 산으로만 갔었느니라
알뜰하게 애태우던 어미 청개구리가 이 세상을
다 살고 떠나려 할 떄, 그의 시체를 산에 묻어주기를
바랬다. 그리하여 모로만 가는 자식의 머리를만지며 내가 죽거든 강가에 묻어다고 하였다
청개구리는 어미의 죽음을 보았을때 비로소
천지가 아득하였다. 그제서야 어미의 생전에
한번도 순종하지 않았던 것이 뼈 아프게 뉘어쳐졌다
청개구리는 조그만 가슴에 슬픔을 안고, 어미의
마지막 부탁을 좋아 물 맑은 강가에 시체를 묻고,
무덤 위에 쓰러져 발버둥치며 통곡하였다
그후로 장마비가 올 때마다 어미의 무덤을 생각하였다
시뻘건 황토물이 넘어 원수의 황토물이 넘어 어미의 시체를
띄워갈까 염려이다 그러므로 청개구리는 장마 때에 운다
어미의 무덤을 생각하고는 먹을 줄도 모르고 자지도 않고
슬프게 슬프게 목놓아 운다
< 자화상 - 서정주 >
에비의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 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깜한 에미의 아들
갑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하는 외할아버지의 숫많은 머리털과
그 커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물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8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으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질 않을란다
찬란히 티워 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별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닷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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