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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중해 중심의 지리적 틀을 깨고 해양제국을 건설했던 스페인에 대해서
    아들을 위한 인문학/세계 도시 2024. 3. 26. 03:14

    스페인제국

    스페인어는 브라질을 제외한 거의 모든 중남미 국가의 공식언어다. 이는 4억명으로 추산되어 중국어 다음으로 많다. 유럽 변방에 머물던 스페인은 15세기 말부터 해외로 진출하면서 세계제국을 형성하는데 성공했다. 그 시기에 이베리아 반도에 있는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경쟁적으로 대서양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포르투갈은 남쪽으로 전진해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와 동남아시아에 진출했다. 스페인은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 대부분을 점령한 뒤 태평양을 건너 필리핀까지 지배하는 세력으로 성장했다. 1580년부터 1640년까지 이어진 펠리페 2세 치하에서 스페인과 포르투갈 두왕국이 통합됨으로써 명실상부한 세계제국이 탄생했다. 스페인제국은 아메리카에서 약탈한 금은으로 중국과 인도의 비단과 향신료를 구매함으로써 세계를 하나의 시장으로 묶었다. 또 이탈리아나 네덜란드, 지중해 등지에서 다양한 전쟁을 일으켜 군비로 금은을 지출했고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를 강제로 데려왔다 이들은 아메리카 식민지의 대농장 노동에 투입, 세계적으로 유통되는 최초의 소비상품인 사탕수수, 담배, 커피, 면화 등을 생산했다

     

    스페인이 세계제국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막강한 군사력 덕분이다 이베리아반도는 당초 로마제국의 영토였다. 기독교 세계에 편입되었다가 8세기 이슬람 세력에 점령당하기도 했다. 유럽을 두고 벌이는 기독교와 이슬람 문명권의 각축 구도에서 스페인이 경계 지역이 된 것이다. 스페인의 기독교 세력은 1492년 그라나다를 함락시켜 동안 700년간 전쟁을 벌였다. 스페인 역사에서 15세기 아메리카 진출이 중요한 사건이다. 그보다 화급한 과제는 반도의 통합이었다. 중세 이베리아반도에서는 카스티야, 갈리시아, 레온, 나바라, 아라곤, 포르투갈 등 여러지역의 군주들이 각각 이슬람 세력과 전쟁을 벌이면서 성장해왔다. 15세기부터 17세기 반도를 중심으로 복잡한 정략결혼을 성사하면서 전쟁을 벌였다. 1469년 카스티야의 이사벨 1세와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가 결혼하며 스페인이라는 거대한 세력이 등장했다.

     

    스페인제국과 오스만제국

    특히 오스트리아와 북유럽, 이탈리아 등지에서 많은 영토를 계승한 합스부르크가문의 카를로스 1세가 1516년 통합왕국을 물려받음으로써 로마제국 이후 유럽이 하나가 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다. 카롤로스 1세는 1519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선출되었고 유럽을 하나로 묶으기 위한 전쟁을 필요로 했다. 카롤로스 1세의 유럽제국이 확장하는 시기에 지중해 동쪽에서 오토만제국이 부상했다. 오토만제국은 이슬람을 믿는 투르크민족의 제국으로 1453년 비잔틴제국의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뒤 로마제국의 계승자로 주장했다. 각각 마드리드와 이스탄불에 중심을 둔 제국이 유럽을 놓고 자웅을 겨루는 형국이었다. 이베리아 반도의 통합, 유럽세력과의 경쟁, 오토만제국과의 전쟁 같은 중차대한 일에 비하면 해외진출은 부차적인 일에 불과했다. 메리카 원주민들의 제국인 아스테카와 잉카를 각각 1521년과 1532년 붕괴시킨 스페인 군대는 불과 수백명에 불과했다. 너무나 쉽고 신속하게 거대한 해외제국을 만들어갔다. 이 사례는 유럽 내에서 일확천금의 신화처럼 퍼져나갔다. 1540년 들어 볼리비아 포토시에서 은광이 발견되면서 스페인의 해외제국은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스페인 역사에서 16세기 중반부터 17세기 중반까지를 황금세기라 부른다. 카를로스 1세는 거대한 제국을 둘로 나누어 오스트리아와 독일 지역 영토는 동생에게 위임했고 스페인, 네덜란드, 이탈리아 남부 그리고 해외제국은 아들 펠리페 2세에게 줬다. 스페인의 황금세기는 일반적으로 펠리페 2세가 즉위하는 1556년부터 펠리페 4세가 프랑스 루이 14세와 피레네조약을 맺은 1659년까지를 지칭한다. 펠리페 2세가 통합한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쌍두제국은 세계의 모든 바다를 지배했다. 스페인이 지배하는 포토시에서 캐낸 은은 중국이나 인도에서 태평양을 건너온 상품을 사는데 사용되었다. 1493년과 1800년 사이 세계 은의 85%와 금의 70%는 아메리카에서 생산되었다. 또한 거대한 중남미 지역을 지배하고자 스페인은 본토에서 많은 인력을 송출했다. 정착민은 1570년까지 12만명 정도였고 1650년대에 이르러서는 40만명을 웃돌았다. 당시 스페인 제국의 부는 이베리아반도의 지정된 항구들을 거쳐서만 움직였다. 포르투갈에서는 리스본이 스페인에서는 시기에 따라 카디스 또는 세비야였다. 특히 금은은 이들 항구에서 20%의 관세를 왕실에 상납해야 했다. 과거 베네치아가 지중해 무역을 지배할 때 모든 선박을 베네치아를 거치게 한 것과 유사한 것이다

     

    펠리페 2세는 마드리드 근교에 엘에스코리알이라고 하는 왕궁과 성당 및 수도원을 겸한 거대한 복합 건축물을 건설했다. 종교개혁의 바람이 세차던 16세기 유럽에서 스페인 왕실이 가톨릭을 수호하는데 으뜸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는 프랑스 베르사유궁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 한편 아메리카에서 원주민과 흑인 노예들이 생산한 은을 유럽, 그중에서도 특히 스페인이 독점해 사치와 전쟁과 무역에 사용했다. 그 시기 스페인의 씀씀이는 유럽을 먹여 살리는 동력으로 작용했다. 군사 강국 스페인의 귀족들은 전통적으로 상업이나 금융을 멸시했고 이 분야는 외국인에 의존했다. 자금 관리는 바르셀로나의 상인들이 아니라 독일의 푸거가문이나 제노바의 자본가들이었다. 그리고 아메리카에서 급격하게 대량 유입된 은은 유럽 전체에 인플레이션을 가져왔다. 1500년부터 1630년까지 식량가격은 세배 그리고 다른 상품들의 가격은 다섯 배나 뛰었다. 스페인은 많은 전쟁을 치르면서 경제력이 뒷받침이 되지 않아 몰락할 수 밖에 없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특히 플랑드르의 프로테스탄트의 네덜란드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벌인 80년 전쟁은 스페인의 국력을 소모하는 데 결정타를 날렸다

     

    전쟁이 발발한 지역으로 자금을 보내는 문제는 스페인의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유럽 금융의 발전을 가져왔다. 이탈리아, 플랑드르, 독일 등의 자본가들을 어음을 사용해 은의 이동을 최소화함으로써 비용을 절감했다. 자본가들은 네덜란드에서 스페인의 군자금을 대는 조건으로 그 가치만큼의 은을 스페인에게 받아 자신들이 필요한 곳으로 수출하는 권리를 얻는 식이었다. 스페인은 전쟁으로 인한 지출 때문에 80년 전쟁기간 잦은 파산을 선고했다. 1576년부터 1653년까지 6번 이상을 파산을 하여 자금을 빌려줬던 푸거가문이나 제노바 은행가들의 연쇄 파산으로 이어졌다. 일부 정치경제학자들은 17-18세기 스페인의 쇠퇴와 영국과 네덜란드의 부상을 금융제도의 차이에서 찾기도 한다. 식민지의 은에 대한 징세에 의존한 스페인보다 선진적인 국채 금융시장을 통해 국내 자본가들에게서 성공적으로 자금을 확보한 영국이나 네덜란드가 장기전에서 우세할 수 밖에 없다고 분석한 것이다

     

    스페인과 영국 두나라는 세계경제의 중심이 지중해에서 북해로 이동하는 16세기에 맞붙은 양대 세력이었다. 영국은 개방적이었고 시장을 중시하는 전통을 가졌던 데 반해 스페인은 폐쇄적 사회로 국가가 경제에 개입하는 성향이 짙었다. 또한 영국은 독립적 사법부가 소유권을 강력하게 보호했던 반면 스페인은 파산이 잦았던 중앙집권적 정부가 과도하게 세금을 올리곤 했다. 따라서 거래비용에서 스페인이 많이 들었다는 것이다. 영국은 자신의 식민지인 미국에도 비슷한 제도를 이식했고 스페인도 중남미에 폐쇄적이고 관료적인 사회 모델을 수출했다. 또한 스페인 경제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 또 다른 요소는 종교의 극단적 배타성을 들 수 있다. 상대적으로 건조한 스페인에 이슬람 세력의 관개농업은 식량생산을 늘리는데 크게 이바지했다. 이들을 추방하며 억압하였고 유대인들도 수공업, 금융업, 상업 등에서 스페인의 경제발전의 중추였는데 추방시키거나 강제로 개종시켰다. 펠리페 2세는 종교재판을 도입하기도 했다

     

    이베리아반도에서 추방된 유대인들은 대부분 네덜란드와 영국 등 북유럽으로 떠났다. 개방적인 네덜란드와 영국은 종교로 인한 박해가 상대적으로 적었고 자유가 보장되었다. 이들은 개종한 이베리아반도에 남은 친척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유럽의 무역 및 금융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데 이바지했다. 1640년대가 되면 스페인 항구에 들어오는 상품 가운데 75%가 네덜란드 배에 실려 온 정도로 네덜란드와 스페인의 긴밀한 관계를 드러낸다. 한편 프랑스 대혁명과 19세기 초 유럽을 뒤흔든 전쟁의 와중에 스페인의 중남미 식민지들이 1820년대까지 반란을 일으키면서 스페인제국은 붕괴하기 시작했다. 유럽이 주도한 산업혁명과 자본주의 발전을 뒤에서 간신히 따라가는 처지로 전락했다. 스페인제국은 용감한 전사들을 활용해 영토를 확장하기는 했어도 그 넓은 지역을 오랜 기간 지배할 수 있도록 부를 창출하는 경제구조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하지만 스페인제국의 은은 세계 각지의 다양한 자본가와 사업가들이 자본주의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재료로 가능했고 신용을 바탕으로 하는 금융시스템 발전의 토대를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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