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도덕경 21 ) 神器라는 국가의 통치자는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아들을 위한 인문학/도덕경(노자) 2022. 12. 17. 03:15
노자가 통치자에게 필요한 것은 신중함이라고 하였다. 통치자는 작은 생선을 굽듯이 아주 신중해야 한다고 한다. 무지에서 오는 우왕좌왕이 아닌 그 반대편 것까지 인식의 범위 안에 들어와서 경솔한 결정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헛똑똑이들 즉 지자에게 과감하게 행동하지 말라고 한다. 지자는 한쪽면만 바라보고 결정하여 예상치 못한 방향을 알 수 없다 즉 전쟁을 각오해야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 전쟁과 평화는 다른 두면을 가진 하나의 사건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유무상생의 원리이다. 전쟁을 일으킴과 막음이 공존해야만 평화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전쟁을 막으려고만 하면 국민들은 비굴해지고 불안해질 수 있다
성경을 백번 읽은 사람과 한번만 읽는 사람들의 태도가 다르다. 백번을 읽은 사람은 불자와도 평화롭게 지내나 한번만 읽는 사람은 불자와 적대시한다. 유무상생 원리를 이해한 사람은 대립면의 상호의존을 의식하는 자로 숙고해지고 신중해진다. 모든 악의 근원은 무지하여 사유하지 않는 것이다. 한편 우리는 누구나 결국에는 한쪽을 선택하게 된다. 그러나 그 선택이 깊은 사유에서 나왔느냐 아니면 아무런 사유없이 나왔느냐에 따라 그 성숙도나 설득력이 매우 다르게 나타난다. 한 진영만 선택한 사람은 자기가 얼마나 잔인한 폭력을 행사하는지 의식하지 못할 뿐 아니라 심지어 양심을 행사하고 있는 것으로 착각한다. 반면 대립면의 상호의존이라는 인식을 가지면 진영 논리에 빠져서 그 진영의 논리를 상대방에 쉽게 강요하는 일이 적어진다
유무상생의 원리를 이해하는 자는 유나 무의 테두리 안에 느슨함 내지 여유가 있어 대립면을 받아들여 협치나 포용을 생각하게 한다. 지금 우리 사회가 조선시대 당쟁이나 진영에 빠져 서로 비난만 일삼는 것이다. 공자의 정명론처럼 개념을 바르게 정하여 사용하자는 말은 어떤 개념도 여백과 틈을 주지 말자는 것과 다름없다. 名可名非常名은 개념을 여백이나 틈 없이 사용해서는 세계의 진실을 담을 수 없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보통 사람은 언어를 사용하지만 시인은 언어를 지배하고 있다. 시인을 언어를 재배치하고 개념과 개념 사이에 틈과 여백을 남긴다. 그 틈과 여백 사이에 소리를 심는다. 그래서 탄력있는 감동을 선사한다. 협치와 포용도 마찬가지로 배척이나 편가르기에 비해 감동을 준다
노자사상의 수사학적 특징은 無爲而無不爲에서 뒤로 물러서라 그러면 앞설 것이다 구부려라 그러면 온전해질 것이다 줘라 그러면 갖게 될 것이다가 무위이무불위 사상을 갖고 있다. 이것도 모두 유무상생의 원리에서 줘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성경에서 사랑이 폭력을 이길 수 있는 사상과도 접목되지 않나 보인다. 흔히 노자의 철학이 소극적이고 반문명적인 것으로 인식되는데 그와는 반대로 도덕경은 천하를 얻는 방법을 말해주고 있다. 이는 노자는 무위에 머물러 멈춰 있는 것이 아니라 무불위에 가 있어 온전해지는 것, 갖는 것, 앞서는 것이 노자가 도달하는 것이다. 따라서 통치자는 지자가 아닌 유무상생의 원리를 이해하고 이를 응용하는 자이어야 한다. 노자는 이념과 도덕 정치를 행하는 것은 한편으로 치우치는 편가르기식이므로 경계하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구분을 짓는 것으로 참거짓을 구분하여 거짓을 배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자는 거짓도 고려하는 정책을 펴라는 것이다
'아들을 위한 인문학 > 도덕경(노자)'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도덕경 23 ) 노자가 완전한 존재인 갓난아기는 無爲와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까 (0) 2022.12.31 ( 도덕경 22 ) 去皮取此인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하라는 의미가 무엇인가 (0) 2022.12.24 ( 도덕경 20 ) 장차 뺏고 싶으면 먼저 주어야 한다며 이것을 微明이라고 하였는데 (0) 2022.12.10 ( 도덕경 19 ) 恒無欲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0) 2022.12.03 ( 도덕경 18 ) 구부러짐이 자연의 이치를 담았다고 하는데 (0) 2022.1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