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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덕경 17 ) 진정한 앎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노자는 絶學에서 찾았는데아들을 위한 인문학/도덕경(노자) 2022. 11. 19. 03:58
노자 : 絶學無憂
(배움을 끊으면 근심이 없어진다는 기존 학문에 대한 모방의 배움을 경계하라는 의미로)
學 배운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모방이다. 이미 있는 것을 흡수하고 거기에 자기를 맞추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는 자신이 자신으로 존재하기 힘들다. 언제나 모방하고 따라야 할 대상을 추구해야 하니까 자신이 자신의 주인으로 설 수 없는 구조다. 항상 외부의 모델에 자신을 맞추어야 한다면 근심과 혼란이 끊이지 않는다. 배움의 궁극적 목적은 자기가 이 세계에서 어떻게 살다 갈 것인가를 알고 그것을 수행하는 일이 진정한 배움의 길이다. 모방한다는 것은 자기가 자기 삶을 정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삶을 모범으로 정해놓고 그것을 추종하는 것이다. 학의 방식을 취하게 되면 자기 삶에 자기가 없고 다른 삶이 자기 삶으로 들어와서 내 삶이라고 자꾸 착각하게 만든다
요즘 젊은이들은 자신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본다. 저마다 삶은 자기 자신을 향해 가는 길이다라는 헤르만 헤세의 말이 상기된다. 우리는 왜 배우는가 ? 잘 사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서다. 그럼 잘 사는 주체는 누구냐 ? 바로 자기 자신이다. 그런데 자기 삶의 방법을 찾기 위해 배우는 것이 아니라 잘 산 다른 사람의 삶을 따라 하기 위해서 배우는 경우가 너무 많다. 그럼 잘 살려면 자기의 삶을 어떻게 결정해야 할까 ?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이것이 분명해야 한다. 시대에 대한 깊이 있는 인식과 자기 자신에 대한관심이 있어야 한다
자신을 향해 걷는 삶을 살면 그냥 낭만적인 충족감만으로 만족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렇지는 않다. 자신을 향해서 걷는 삶이 현실적으로도 큰 성취를 이루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세계에 등장한 것들 가운데 대답의 결과로 나온 것은 단 하나도 없기 떄문이다. 모두 질문의 결과들이다. 질문은 자신에게만 있는 궁금증과 호기심이 튀어나오는 활동이다. 자신의 삶을 사는 사람들만이 질문을 할 수 있다. 대답은 타인이 만든 이론과 지식을 그대로 품었다가 누가 요구할 때 그대로 다시 뱉어내는 일이라서 주도권이 자신에게 있을 수가 없다. 그것들을 만든 타인들에게 주도권이 있다. 이런 의미에서 세상에 등장한 모든 것은 자신을 향해 걷는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들이다. 그래서 자신이 자신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낭만적인 충족감만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큰 성취까지도 보장한다
절학은 배움을 끊는다고 해석되지만 배움을 부정한다기 보다는 모방하는 배움의 태도에만 빠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추종하고 모방하고 따라 하는 배움 너머의 궁금증과 호기심이 작동하는 질문하는 배움의 자세가 필요하다. 따라서 모방하고 따라 하는 배움에만 빠지면 그 시대에 해결해야 할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찾아 거기에 몰두하기보다는 자신이 배운 이념이나 내용에 그 시대를 적용시켜려는 무모한 마음을 먹게 된다. 근대 제국주의가 동아시아를 침략할 올 때 일본의 요시다라는 사람이 야무구치의 하기시에 작은 학교를 세웠다. 거기서 2년 정도의 짧은 기간에 90명의 인재를 길렀는데 혁명과정에서 반이 죽고 반이 살아남아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켰다. 이 젊은이들이 일본의 근대화를 연 것이다. 반면 그때 조선에는 3백개 이상의 향교와 서원에서 밤을 세워가며 공부를 했지만 여기서는 공자와 맹자의 주자학에만 몰두했다. 여기서의 차이는 시대의 급소를 잡고 자기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자기가 무엇을 원하는지, 자기가 처한 시대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찾아서 공부하였다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요즘 젋은이들이 각성하고 자각하는 힘 없이 정해진 내용을 숙지하는 학습만 계속해서는 강한 자기, 부강한 나라를 만들 수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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