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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교적 정치 이념을 실현시킨 고려 성종의 최승로의 시무 28조에 대해서
    아들을 위한 인문학/정치 2022. 7. 5. 04:44

    후삼국을 통일을 달성한 태조 왕건은 왕권의 안정을 위해 먼저 각지의 호족들을 포섭하여 지배체제에 끌어들이고자 했다. 그 하나의 시책이 바로 혼인정책이었다. 고려사에 보면 왕건은 6명의 왕후와 23명의 부인을 맞았다고 한다. 왕건은 각 지방의 유력한 호족 내지는 호족 출신 관료의 딸과 혼인함으로써 그들과의 결합을 굳건히 했다. 왕건은 29명의 후비에게서 25명의 왕자와 9명의 왕녀를 얻었는데, 왕실권력과 분산을 꺼려 이복남매 간의 근친혼을 행했다. 혼인정책에도 불구하고 고려 초기 왕은 여러 호족세력의 수장일뿐은 왕권은 약화된 상태였다

     

    호족세력에게 억눌림을 받던 왕권은 광종(949-975)에 이르러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956년 광종은 호족들의 기반을 약화시키고자 노비안건법을 실시했다. 이 시책으로 본래 양인이었다가 노비로 전락한 자들의 신분이 해방되었다. 또한 958년 후주의 귀화인인 쌍기의 건의를 받아들여 과거제도를 시행했다. 과거는 문예나 유교경전의 능력을 시험하여 그 성적에 따라 관리를 등용하는 제도를 말한다. 시험을 통해 신진인사들을 등용하는 과거제도는 공신들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기능이 있었다. 왕권강화를 이룬 광종대를 거쳐 고려는 성종(981-997)때에 체계정비와 사회기반을 이루었다. 성종은 전대 왕들과 달리 신라 6두품 계통의 유학자들을 중용하여 국가의 기틀을 다졌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최승로였다

     

    최승로는 본래 경주 출신으로 신라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할 때 아버지를 따라 고려에 들어와 신라계 인물이다. 12살에 이미 태조 앞에서 논어를 읽었고 그의 영특함에 탄복한 태조가 많은 상품과 특전을 하사했다고 한다. 최승로는 광종 때부터 관료생활을 했었는데 이 당시에는 크게 빛을 보지는 못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가 정계에서 크게 각광을 받은 것은 982년 성종 원년 서정쇄신에 관한 정견을 피력한 상소문을 올리면서부터였다. 982년에 성종은 5품 이상은 각기 봉사를 올려 시정의 득실을 논하라는 명을 내렸다. 왕명은 받은 최승로는 28조에 달하는 시무책을 올렸는데 성종은 이를 읽고 크게 공감을 보였다. 성종의 지지하에 최승로의 시무책은 새로운 국가 체계 정비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최승로가 생존하고 활동하던 성종대는 우리나라 역사상 큰 전환기였다고 할 수 있다. 고려는 후삼국을 통일하여 새로운 시대를 열었으나 고대적인 성격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못하고 있었다. 새 시대를 맞이할 새로운 정치, 사회질서의 확립이 절실히 필요했다. 이에 최승로의 시무 28조가 가지는 의미는 바로 이것이다. 현재 22조만 전해지고 있는데 그 내용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유교 정치 이념의 실현을 추구했다는 점이다. 불교를 행하는 것은 수신의 본이요 유교를 행하는 것은 치국의 근원이다 최승로는 유교이념을 바탕으로 국가를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라를 거쳐 고려 초기에 이르기까지 불교는 가장 영향력 있는 이데올로기이자 종교이념이었다. 최승로는 불교가 끼친 나쁜 영향을 비판하고 정치와 종교 즉 불교를 분리하고자 했다. 이와 같은 주장은 고려 태조 이래 불교를 국가적 신앙으로 숭상하던 당시 실정에 비추어보면 혁신적인 발상이 아닐 수 없었다

     

    최승로는 광종 이래 전제적인 왕권강화로 인한 정치 불안을 염려했다. 따라서 왕권과 신권 간의 조화를 추구하고자 했다. 시무 제 14조에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날로 더욱 삼가시어 스스로 교만하지 말고 신하를 접함에 공손함을 생각하며 혹 죄 있는 자가 있더라도 죄의 경중을 법대로만 논한다면 곧 태평성대를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라 하여 군주의 도리를 강조했다. 최승로는 민생의 안정이 곧 사회발전의 원동력이라 판단했다. 이러한 최승로의 정치이념을 바탕으로 성종은 지배체제 정비해 나갔다. 고려시대의 정치의 중핵인 중서문하성이 성종 2년에 성립된 데 이어 상서성과 중추원, 대간제 및 관료의 질서체계인 문산계 등이 모두 성종대에 이루어졌다. 또한 성종 982년에 전국의 주요 지역인 12목에 상주하는 외관을 파견하여 중앙통치력을 공고히 하였다. 지방관의 파견으로 지방의 호족들은 중앙정부에 흡수되었고 지방호족들은 호장과 부호장 등의 향리신분으로 격하되었다.

     

    최승로의 시무책이 국가체제 정비에 반영된 이후 고려사회는 그 이전 사회와는 달리 보다 진일보한 사회로 나아갔다. 저 개인적으로 우선 현 우리나라 정치체제에서 제왕적 대통령제를 미국처럼 본연의 집행부의 수장으로 역할을 축소하고 미국처럼 국민의 대표인 국회의 권한을 강화하고 그 대신 국회의원의 여러 막강한 특권을 국민에게 돌려주고 국민의 위한 통치를 할 수 있도록 국회의원의 권한의 분석을 해야 한다. 또한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는 검찰총장과 경찰총장 및 국세청장은 대통령이 임명하는 것이 아닌 국민의 통제하에서 선거 내지 국민적 합의체에서 선출되어 국민의 권리를 제한하는 강력한 기관은 국민만을 바라보게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 검수완박을 조속히 실현하여 수사와 기소를 분리하여 국민의 권리를 더 보호할 수 있도록 권한을 분산하고 서로간 민주적 통제가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 외교와 통일문제는 국민적 공감대가 이루어지는 방향으로 흘러가야 한다. 보수언론에 기울어져 편협된 역사를 왜곡하는 것이 아닌 진정 한반도의 미래를 생각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강대국에 나름 주장하면서 한반도의 권리를 챙기는 외교를 행사하길 바란다. 이런면에서 인도가 참 잘하고 있다고 생각이 든다. 교육과 인구정책도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개혁적 교육과 인구정책이 절실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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