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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을 판다는 사당패는 버나, 살판, 어름, 덧보기, 덜미를 공연했다고 하는데아들을 위한 인문학/조선시대 직업들 2022. 5. 23. 04:24
서울 이남에 무당 같으면서 무당이 아니고 광대 같으면서 광대가 아니고 비렁뱅이 같으면서 비렁뱅이가 아닌 자들이 떼 지어 다니면 음란한 짓을 한다 - 이옥 <사당> 조선시대 유랑하며 공연을 선보여 먹고사는 무리를 사당패라 불렀다. 사당패의 기원은 才僧이다. 재승은 사찰에서 열리는 불교행사에서 각종 공연을 보여주는 승려로 불경간행, 법당 중수, 비석 건립 등에 쓰일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절밖으로 나와 공연을 했다. 신라때 원효는 파계한 이후 재승이 되어 전국을 돌아다니며 무애희로 중생을 교화했다. 고려시대에는 연등회, 우란분재와 같은 불교행사에서 재승을 비롯한 사당패가 여러 가지 연회를 베풀었다. 힘들게 살아가다가 억울하게 죽어 간 불쌍한 영혼을 위로하는 취지로 수륙재를 거행할 때 걸어 두는 감로탱에는 사당패의 연희 장면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사중에 속하는 남자 재가신도 우바새와 여자 재가신도 우바이를 조선에서는 거사와 사당이라고 불렀다. 사당은 사찰에 딸린 노비나 광대를 가리키기도 한다. 비구니와 버림받아 갈 곳 없는 여인들은 각 지역에 세워진 사당에 모여 살았는데 그곳에 사는 여인을 뜻하게 되었다. 이들은 여사당 또는 사당 등으로 불렸으니 모두 불교와 깊은 관계가 있다. 사당은 무리 지어 유랑하면서 연희를 베풀어 돈을 벌었고 날씨가 추워지면 본거지인 사찰로 돌아가 겨울을 나면서 기예를 연마했다. 안성의 남사당패와 청룡사의 관계는 유명하다. 이들은 어느 절에서 왔다는 사찰의 신표를 들고 다니며 연희를 베풀고 부적을 팔았다
남자는 거사가 되고 여자는 사당이라 칭하여 본분의 일을 일삼지 않고 승복을 걸치고 걸식하며 서로를 유인하여 그 무리들이 번성하고 있다. 그런데도 관가에서 금단하지 않으므로 백성 태반이 떠돌아다니며 살아가 도로에 줄을 잇고 산골짜기에 가득하다. 적게는 백여명, 많게는 천여명이 무리를 이루게 되었다. 한편 1607년 사헌부 상소를 통해 임진왜란 이후에는 삶의 터전을 잃은 사람들이 사찰로 흘러들어 사당패가 늘어났음을 확인할 수 있다. 명색이 사당패지만 그야말로 오갈 데 없는 유랑민이었다. 생활이 어려워진 사당패는 가무희를 앞세우고 뒤에서는 몸을 팔았다. 모갑이라는 서방격의 남자와 거사라는 남자들이 각각 사당 한명과 짝을 맞춰 사당을 착취하면서 살아갔다
이런 이유로 조선시대 문인들의 기록은 사당패에 부정적이다. 이옥은 남자들을 농락하며 온갖 꾀로 돈을 요구하는이 사람들의 정체를 도대체 모르겠다고 했다. 벗 송생이 사당과 동침하면서 혼쭐 낸 이야기도 전했다.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창고를 관리하는 자가 멀리해야 할 무리로 사당을 첫 번째 꼽았다. 이긍익은 연려실기술에서 사당패를 줄이는 정책을 제안했다. 이미 선조때 사당패를 관노비로 거두거나 북방 지역에 이주시키려 했음에도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조선후기에 이르면 사당패는 본거지와 특기에 따라 걸립패, 솟대쟁이패, 광대패, 굿중패 등의 다양한 유랑 예인 집단으로 분화했다가 다시 남사당패로 통합되었다. 이들은 자기들만의 독특한 언어를 사용했다. 남사당패는 꼭두쇠를 중심으로 농약연주인 풍물, 대접을 돌리는 묘기인 버나, 땅재주를 넘는 살판, 줄타기인 어름, 가면극인 덧보기, 꼭두각시놀이인 덜미를 펼쳤다. 초라니패는 집집마다 들러 장구를 치며 고사소리를 불러주었다. 굿중패는 승려가 직접 연희에 참여하여 괭과리를 치고 염불을 외우며 공연을 했다. 풍각쟁이패는 소리, 퉁소, 북, 가야금, 해금 등 악기를 연주하며 검무도 선보였다
대광대패는 낙동강 일대에서 활동했고 솟대쟁이패는 경상도 진양이 본거지였다. 솟대쟁이패는 1910년 후반 매일신보에 공연을 한다는광고를 낼 정도 인기를 누렸다. 이들의 재주가 무형 문화재로 인정되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세상을 떠돌며 사람들에게 웃음을 팔며 살아갔지만 정작 자기들은 웃을 일이 많지 않았다. 젊은 나이에 지팡이를 짚은 채 잘 걷지도 못하거나 얼굴이 헐어 딱지가 가득했다고 하니 공연 중 발생한 사고나 성병을 비롯한 여러 질병에 시달리다가 일찍 세상을 떠난 것을 보인다. 이들을 감로탱의 주인공 삼은 것은 힘든 삶을 살아갔던 영혼을 위로함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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