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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후기에 소설을 읽어주는 남자라고 하는 전기수는 어떠했나아들을 위한 인문학/조선시대 직업들 2022. 4. 28. 03:04
종로 담배 가게에서 소설 듣던 사람이 영웅이 실의하는 대목에 이르러 눈을 부릅뜨고 입에 거품을 물더니 담배 써는 칼로 소설책 읽어 주는 사람을 찔러 그 자리에서 죽였다고 한다 - 1790년 정조실록 - 18세기 조선은 소설에 빠졌다. 임금이 사는 궁궐에서 촌구석까지 소설을 즐기지 않는 곳이 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수요가 있으면 공급이 따르는 법, 서울에는 열다섯 곳에 이르는 책 대여점, 즉 세책점이 성업했다. 세책점은 장편 소설을 여러 권으로 나눠 손님이 연거푸 빌리도록 만들었다. 사람들은 뒷이야기가 궁금했던 나머지 세책점을 들락거리다가 빚을 내는 데 이르렀다. 여인들은 비녀와 반지를 담보로 맡기고 소설을 빌렸다.
이덕무는 이야기책을 탐독하여 가사를 방치하거나 여자가 할 일을 게을리해서는 안될 터인데 돈을 주고 빌려 보는 등 거기에 취미를 붙여 가산을 탕진하는 자까지 있다라고 우려했다. 사회적 문제로 보일 정도로 너나없이 소설에 깊이 빠져들었다. 세책점은 글을 알고 여유 있는 사람이 이용했다. 일반 백성이 들락거리기는 쉽지 않았다. 책값도 비쌌고 문맹자도 많았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에 맞춰 소설책 읽어 주는 일을 생업으로 삼는 사람이 생겼다. 이들을 전기수라고 불렀다. 전기수는 소설 낭독 전문가였다. 억양을 바꾸고 몸짓을 곁들여 청중이 소설책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워낙 실감나게 낭독했던 탓에 전기수가 목숨을 잃는 일도 일어났다. 1790년에 살인 사건이 그것이다. 종로 담배 가게 살인 사건은 전기수가 임경업전을 낭독하다가 일어났다. 간신 김자점이 누명을 씌워 임경업 장군을 죽이는 대목에 이르자 곁에서 듣고 있던 사람이 칼로 전기수를 찔렀다. 그는 눈을 부릅뜨고 칼을 휘두르며 전기수에게 소리쳤다. 네가 김자점이렸다. 낭독에 어찌나 몰입했던지 전기수를 임경업전 속 김자점으로 여겼던 것이었다. 전기수는 저잣거리에 좌판을 깔거나 담배 가게 한쪽에서 목청 좋게 소설책을 낭독했다. 전기수가 소설책을 펼치면 누구나 원하는 시간만큼 들었다. 표를 받지도 않았고 좌석이 지정되지도 않았다. 멀찍이서 듣고 떠나는 그만이었다. 전기수의 낭독은 말 그대로 공짜였다.
우리 속담에 공짜면 양잿물도 큰 잔으로 먹는다라고 했다 이토록 공짜를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전기수는 어떻게 돈을 벌였을까 ? 조수삼은 추재집에 전기수가 돈을 버는 비법을 써 놓았다. 추재집 속 전기수가 돈을 버는 비법을 써 놓았다. 추재집 속 전기수는 고전소설 숙향전, 소대성전, 심청전, 설인귀전을 낭독하며 요전법이라는 기술을 썼다. 전기수가 요전법을 쓰면 청중은 돈을 내지 않을 수 없었다 조수삼은 요전법을 두고 묘한 기술이라고 평했다. 요전법의 핵심은 침묵에 있다. 심청과 심봉사가 다시 만날 때 이몽룡과 춘향이 옷고름을 풀때처럼 다음이 몹시 궁금한 대목에서 전기수는 돌연 침묵했다. 청중은 몹시 답답했을 터 앞다투어 돈을 던졌다. 전기수는 돈이 웬만큼 쌓였다 싶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 목청을 돋우며 다시 맛깔난 낭독을 선뵈었다. 이를 두고 조수삼은 말을 많이 하되 잠깐잠깐 침묵하는 게 돈 던지게 하는 비법, 묘리는 사람들이 빨리빨리 듣고 싶어하는 대목에 있다네라고 평했다
일정한 금액을 받으며 부유층을 상대한 전기수도 있다. 고전 소설 요로원야화기 속 전기수 김호주는 부유한 집안을 드나들며 낭독했다.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솜씨 덕에 김호주는 집을 살 만큼 돈을 벌었다. 그의 낭독은 듣는 이가 돈을 아끼지 않을 만큼 대단했다. 영조때 무관 구수훈이 지은 이순록 속 전기수는 용모가 고왔다. 한번 들으면 다시 찾지 않고 다시 찾지 않고 못 배길 만큼 낭독 솜씨도 뺴어났다. 고운 용모에 혼을 쏙 빼 놓는 낭독 솜씨 덕분에 그는 대감집 안방마님들 사이에 이른바 잘나가는 유명인이 되었다. 이 전기수는 곱상한 외모에 맞춰 여장을 하고 양반집 안방을 들락거렸다. 안방마님 여럿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던 그는 포도대장 장붕익에게 체포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소설을 암송하는 전기수도 있었다. 이들은 중국 소설 번역본을 암송해 청중을 사로잡았다. 조선 후기 문인 유경종은 해암고에서 전기수의 서유기 암송을 듣고 표현력과 암기력에 감탄했던 일을 썼다. 유경종이 만난 전기수는 한자어와 한글을 적당히 섞어 가며 서유기를 암송했다. 소설책 한권은 전기수를 통해 열사람, 백사람 귀로 들어갔다. 조선시대 저잣거리를 오가던 남녀노소는 전기수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때로는 즐거워하고 때로는 분노했다. 전기수는 예능인이었고 지식의 전달자였으며 공론장의 구심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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