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들을 위한 오늘의 묵상(2022. 2. 16. 수)아들을 위한 오늘의 묵상 2022. 2. 16. 04:01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벳사이다의 어느 눈먼 이를 치유해 주신다. 그런데 예수님의 치유가 단 한번에 이루어지지 않고 두 번에 걸쳐 이루어진다는 점이 좀 특이해 보인다. 예수님꼐서는 먼저 눈 먼 이의 두눈에 침을 바르시고 손을 얹으신 다음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으신다. 그런데 그가 아직 뚜렷하게 보지 못하자 다시 두눈에 손을 얹으셨고 그제야 그는 시력이 회복되어 모든 것을 뚜렷이 보게 된다.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 그 눈먼 이의 치유가 매우 까다로운 것이어서 예수님께서도 애를 좀 먹으신 것이라고 해야 할까 ? 그보다는 그의 시력이 단계적으로 회복되고 있다는 점에서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실 오늘 복음은 마르코 복음의 문맥 안에서 바라볼 때, 제자들의 상태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수많은 기적과 가르침을 곁에서 쭉 지켜보고는 있었지만 그분을 아직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다. 어제 복음에서도 예수님꼐서는 제자들에게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한다고 단호하게 꾸짖으셨다. 이러한 제자들의 모습은 마치 오늘 복음에서 눈먼 이가 예수님의 첫 번째 시도로 어렴풋이 보게 된 이야기에 빗대어 볼 수 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이다. 눈먼이가 뚜럿이 볼 수 있도록 다시 눈에 손을 얹으셨다는 사실이다. 눈먼이가 뚜럿이 볼 수 있도록 다시 눈에 손을 얹으셨듯이 제자들의 몰이해가 계속되는 상황에서도 예수님꼐서는 그들이 당신을 올바로 바라보고 이해할 수 있도록 더 많은 가르침을 주셨다. 우 리도 예수님을 보고는 있지만 아직 어렴풋이 보는 상태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절망할 필요는 없다. 그분꼐서는 우리가 뚜렷하게 볼 수 있을때까지 계속해서 당신 손을 우리이두눈에 얹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아들들아,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제자들처럼 주님을 제대로 온전히 받아들이지는 못하고 간혹 가다가 주님은 있으신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내가 생각하기에 주님이라는 것은 어떤 형상도 나타나지만 그 속에는 주님은 사랑이라는 것으로 바꾸어 말할 수 있다. 주님이라는 실체 속에 있는 사랑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너희들도 인간으로서 완전히 사랑을 실천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나의 희생 속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편하고 주체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좋아하지 남을 위하고 남의 지시에 따르는 삶을 원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것을 뛰어넘는 삶을 주님은 요구하기에 쉽지 않고 간혹 가다가 인간적 본성으로 그것을 저버릴 수가 있다. 그러기에 우리는 주님을 찾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가 하루라도 흐트러지면 주님을 찾아 우리가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에서 벗어나 더 거룩한 삶을 위해 나아가기 위해서다. 남과 공존하고 배려하는 거룩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다. 우리 아들들아 우리는 주님의 말씀으로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내 자신의 인간적 본능적 모습을 이겨내도록 하자
'아들을 위한 오늘의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들을 위한 오늘의 묵상(2022. 2. 18. 금) (0) 2022.02.18 아들을 위한 오늘의 묵상(2022. 2. 17. 목) (0) 2022.02.17 아들을 위한 오늘의 묵상(2022. 2. 15. 화) (0) 2022.02.15 아들을 위한 오늘의 묵상(2022. 2. 14. 월) (0) 2022.02.14 아들을 위한 오늘의 묵상(2022. 2. 13. 일) (0) 2022.0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