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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항쟁이 있던 탐라국 역사은 어떻게 발전했나아들을 위한 인문학/한국사 2021. 7. 13. 04:53
탐라국의 전설은 한라산 북쪽 삼성혈의 세구멍에서 삼신이 솟아올라와 바다건너 벽랑국 공주들이 나무배를 타고 삼신과 결혼하며 터전을 잡았다고 한다. 삼신중 세력이 강한 고을라왕이 탐라국을 세우는데 기원전 2337년이다. 탐라국이 문헌에 등장하는 것은 기원전 285년이다. 탐라는 주노족과 한민족 등이 섞여 독특한 언어를 사용했으며 탐은 섬이고 라는 나라라는 뜻이다. 탐라국은 척박한 환경극복을 위해 주변국가와 교류했는데 항해술이 뛰어나 중국, 일본, 동남아시아와 왕래하며 고대 삼국과도 교역을 했다. 476년 탐라국왕이 백제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치니 문주왕이 기뻐했다고 하며 498년에는 동성왕이 탐라가 공물을 바치지 않자 공격을 개시하여 백제를 속국으로 하고 국왕을 백제의 신하로 삼았다. 938년에 고려 태조는 탐라의 태자 고말로가 고려 조정에 오자 그를 성주왕자로 칭하였다고 한다. 고려는 과거제도를 도입했는데 탐라인은 외국인으로 보아 빈공과에 응시했다고 한다. 1105년 고려 숙종때는 나라지위를 박탈하고 탐라군으로 명칭을 개정하였으나 한편으로 토착세력인 고씨와 양씨에게 지방자치를 허용했다. 그리고 고려 고종은 바다건너 큰 고을이라고 제주도로 명칭을 변경했다. 1271년 몽고의 침입으로 무신정권의 사병인 삼별초가 대항하였다. 진도에서 제주로 옮겨서 항쟁을 계속했고 애월근처에 방어시설 구축하였으나 여몽연합군 1만3천여명과 맞서 싸운 삼별초는 1273년에 전멸하였다. 이에 원은 말을 관리하기 위해 탐라총관부를 설치하여 100여년을 통치하며 고려의 관리들을 유배보내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제주목, 대정현, 정의현으로 구성되어 제주산음이 설치되어 통제하였으며 주로 감귤을 공물로 바쳤다. 세종때는 인구가 6만명으로 급증하여 타지역으로 이주정책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17세기경에는 제주도민의 출륙금지조치로 감옥과 같이 폐쇄되고 광해군부터 승려 및 도적 등 200여명을 유배보내기도 하였다. 선조의 혈족인 이건은 제주도에서 가장 괴로운 것은 조밥이며, 가장 두려운 것은 뱀이며, 가장 슬쁜 것은 파도소리라고 하였다. 1947년에 제주 4.3항쟁은 무고한 제주도민을 학살한 사건으로 7년동안 3만명이 집단학살이 행해져서 씻지 못한 오점으로 남기고 있다. 지금 제주도는 한국의 최고 휴양지로 각광을 받고 있으나 과거에는 유배지와 학살의 현장으로 슬쁜 역사가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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