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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커피의 상업적 가치를 간파하고 이익을 극대화한 이슬람과 유럽 상인
    아들을 위한 인문학/커피이야기 2025. 2. 18. 02:41

    예멘 나비수아이브산(커피 재배 시작)
    커피벨트
    런던 최초카페(1652년)

    구약성서에서 대홍수가 지나간 후 노아가 방주로 내디딘 곳은 튀크키예의 아라라트산이라고 한다. 그런데 아라비아에도 노아가 방주에서 첫발을 디딘 곳으로 산이 있는데 그것은 예멘의 오래된 도시 사나 옆에 우뚝한 해발 3660m로 아라비아반도에서 가장 높은 나비수아이브산이다. 이 산기슭에서 커피 재배가 시작되었다. 이곳은 이슬람 와인 카와의 재배지로 매우 적합한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커피나무는 연중 서리 내리는 날이 전혀 없을 정도로 온난한 기후와 연간 1200mm의 강우량을 필요조건으로 한다. 2000m를 넘으면 서리가 내릴 위험이 있고 고도 1000m 이하는 여름에 열기가 너무 강했기 때문이다. 최적의 장소는 남서 아라비아의 서쪽 비탈, 마나하를 중심으로 해발 1100~2200m지점을 꼽을 수 있다. 계곡의 풍부한 비탈이 커피 생육에 필요한 일정하고 따뜻한 기온을 보장해 주었으며 홍해에서 올라오는 구름이 습기를 제공해 주었다. 한편 커피를 재배하자면 밭을 개간해야 하고 제대로 된 관개시설을 갖춰야 한다. 그리고 너무 강한 햇빛이나 해충을 피하기 위해 커피나무 주위에 키 큰 나무도 심어주어야 한다. 커피 생산 과정은 복잡한 데다 돈이 많이 들었다. 커피나무를 심어 수익을 내기까지는 5년이란 시간이 걸린다. 커피를 마시는 습관은 순식간에 아라비아, 페르시아, 튀르키예 등 이슬람 세계를 넘어 남아시아, 남동아시아로 퍼져 나갔다. 커피하우스도 아라비아 세계 전역으로 확산되는 동시에 차츰 유럽에 보급되기 시작했다. 1652년 런던, 1666년에는 암스테르담, 1671년 파리 등 유럽 각 도시에 생긴 최초의 카페가 생겼다. 예멘은 세계 커피 시장을 독점하는 국가로 위세를 떨쳤다. 생산자에게 구매한 커피는 최종적으로 티하마 평원에 위치한 마을 베이트알파키에 집결했다. 아랍 유럽 인도 커피 상인이 이곳으로 모였고 커피를 출하하는 곳은 모카, 호데이다 등 홍해에 접해 있는 항구였다.

     

    카이로 커피상인
    메카 카라반 순례자
    모카 항구(모카 커피)

    16세기에 유럽인의 인도양 진출이 본격화됨에 따라 카이로의 거상들은 오리엔트 교역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며 그 손실분을 메우기 위한 대응책을 찾은 것이 커피였다. 커피는 17,18세기에 그들의 대표 상품으로 섰다. 카이로의 창고는 예멘에서 재배된 커피가 수납되는 주요 장소였다. 경로는 두가지였다. 예멘에서 육로로 북상하면 이슬람을 상징하는 도시 메카가 있다. 메카는 이슬람인의 성지일 뿐 아니라 당시 세계에서 가장 풍요로운 시장이 열리는 곳이었다. 메카를 찾는 성지 순례자의 카라반 부대가 자연스럽게 거대한 수송기관이 되었다. 예멘 커피는 이들 카라반 부대를 통해 카이로로 운반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홍해 바닷길로 운송되는 양의 고작 1/10에 지나지 않았다. 대부분의 커피는 예멘 연안 항구에서 홍해를 건너 카이로로 옮겨갔다. 한편 커피는 저장이 수월한 상품이다. 실제로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창고에 넣어두어도 그다지 품질이 떨어지지 않는다. 곡물의 천적인 쥐들이 다른 곡식은 다 건드려도 커피만은 건드리지 않는다. 따라서 투기적 매입이 가능하기도 하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1602년)

    레반토 상인보다 훨씬 광범위하게 커피 교역에 참가한 이들은 바로 네덜란드인이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로테르담과 암스테르담 출신 상업자본가들이었다. 예멘이 오스만제국에 정복당한 해는 1536년이다. 인도항로, 신대륙과 서인도제도 발견 등의 지리상 대발견이 세계시장으로 향하는 무역 루트를 크게 뒤흔든 즉 세계시장의 혁명을 불러온 시기와 겹치는 때였다. 예멘 커피가 전 세계로 퍼져 나가기 시작할 당시 홍해는 이슬람 세계와 유럽의 그리스도교 세력이 접하는 지점으로 포르투갈과 네덜란드의 삼본 마스트 범선이 출범한 이후 국제상업전쟁의 격전지가 되어 있었다. 모카 커피가 암스테르담에 정기적으로 수입된 것은 1663년의 일이다. 메카나 메디나로 전해지고 또한 인도나 인도네시아의 이슬람권으로 퍼져 나갔다. 1602년 설립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1642년에 커피 3.2만킬로그램을 인도의 캘커타에 들여왔다. 네덜란드 상인은 이슬람 와인을 고국에서 멀리 떨어진 인도의 이슬람교 신도에게 실어다 주었다.

     

    자바섬에 커피묘목
    자바섬 플랜테이션

    네덜란드 상업자본가들은 수요와 공급 차이로 인해 막대한 이익이 보장된다는 점이었다. 커피 소비량은 날로 늘어가는 데 반해 커피 산지라고는 예멘이 유일했기 때문이다. 암스테르담과 로테르담 상인은 원두를 사서 파는 것보다 직접 생산해서 파는 것이 훨씬 이익이 크다는 점을 이내 간파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식민지에 커피 플랜테이션을 구축한 것은 그런 맥락에서였다. 첫 시도는 1658년 실론 오늘날 스리랑카였다. 네덜란드의 커피 대표 산지가 된 곳은 스리랑카가 아니라 인도네시아의 자바섬이다. 자바 커피는 자카르타에서 암스테르담으로 1712년 산지 직송되었다. 이는 식민지 커피가 탄생하게 되었다. 자바 커피는 독특한 풍미와 빛깔, 아로마는 전 유럽에서 호평받았으며 순식간에 스탠더드커피 자리를 차지했다. 바야흐로 커피는 유럽의 식민지주의 역사를 검게 물들이는 상품으로 자리 잡아갔다. 17세기 전형적 자본주의 국가 네덜란드가 취한 방식은 철저하면서도 상당히 합리적이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자바섬의 지배세력을 폭력을 동원해 제압하지 않고 자바 지배층과 결탁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자바섬 농민은 커피 플랜테이션에서 무보수로 일하든가 아니면 자신의 농지 일부를 커피 재배에 제공하도록 강요당했다. 생산된 커피는 정해진 값에 네덜란드에게 팔렸다. 따라서 쌀농지가 커피농지로 바뀌면서 제 3세계가 식량 부족으로 한 지역 전체가 굶어 죽는 참극이 일어나는 구조적 모순이 생겼다. 커피는 자연적 음료라고 말하기 어렵다. 개나 고양이가 마시는 그런 음료가 아니라는 의미다. 창고에 쌓아둔 커피콩을 굶주린 쥐조차 거들떠보지도 않을 정도다. 마시면 잠이 오지 않는 커피를 본격적으로 마시기 시작한 이는 수피교 수도사와 신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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