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병에 걸리면 무당만 찾았던 시대에 의료체계와 약초꾼은 어떻게 발전했나
    아들을 위한 인문학/조선시대 직업들 2021. 12. 6. 04:26

    지금 서울 사람은 걸핏하면 탕약을 지어 먹지만, 먼 산골짜기에서 사는 백성은 의원과 약방이 있는 줄도 몰라서 병에 걸리면 누워서 앓기만 하다가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한다 < 이익, 성호사설 >

     

    1123년 고려를 방문한 송나라 서긍에 따르면 고려사람들은 병에 걸려도 약을 먹을 줄 모르고 무당만 찾았다고 한다. 무식해서가 아니라 의료환경이 열악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한양에는 그나마 혜민서, 활인서 등 백성의 치료를 담당하는 기관이 있었다. 그런데 지방에는 인턴에 해당하는 의생과 진상 약재의 품질을 점검하는 심약을 파견하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조정에서는 <향약집성방>을 비롯한 의서를 편찬, 보급한 것도 열악한 의료환경을 개선하려는 노력이었다. 서울 양반들조차 안면 있는 관원에게 약재를 조금씩 얻어 쓰는 형편이었으니 지방 백성은 약 한 첩 지어 먹기 어려웠다

     

    뜻 있는 지방관은 지방 유지와 협력하여 자구책을 마련했다. 1367년 안동 부사 홍백정이 설립한 약원은 약재 창고에 목욕탕과 숙박시설까지 갖추었다. 하지만 이런 의료시설은 설립도 어렵고 유지는 더욱 어려웠다. 의료환경이 이처럼 열악한 탓에 사람들은 각자도생의 길을 모색했다. 간단한 의술과 약재에 대한 지식은 상식에 속했다. 직접 약초를 캐어 약을 조제하는 능력이 효자의 자질로 손꼽힐 정도였다. 웬만한 집에서는 약포라는 약초밭을 일구어 상비약을 마련했다. 재배한 약초를 빌리거나 빌려주기도 했다. 1683년 안동 선비 이유장은 천연두에 걸리자 친구 열세 명에게 열다섯 가지 약재를 빌렸다. 잊지 않고 갚기 위해 품목과 수량을 꼼꼼히 적어 두었다

     

    이렇게 알음알음 약재를 주고받던 단계를 지나 약계라고 하는 협동조합이 탄생했다. 여러사람이 돈을 모아 약재를 구입해 두었다가 필요할 때마다 값을 치르고 갖다 쓰는 식이다. 돈이 없어서 문제가 아니라 약이 없는 것이 문제였던 만큼 이렇게 모아 둔 약재는 큰 도움이 되었다. 지금도 남아 있는 경북 상주의 존애원 역시 약계의 일종이다. 노는 사람들을 모아 약재를 캐게 하고 중국산 약재까지 구입해 갖추었다. 멀리서 찾아오는 사람들을 위한 숙박시설도 마련했다. 약계는 약국으로 발전했다

     

    약국은 본디 왕실의 의료행위를 담당하는 내의원의 별칭이다. 약국 주인을 뜻하는 봉사 역시 원래 내의원의 관직명이다. 조선 후기에는 민간 약국이 번창했다. 서울 구리개(을지로)에는 약국이 밀집하여 약국거리를 형성했다. 여기서 약재 매매를 중개하는 약쾌, 약초 채취꾼 약부, 수많은 의원과 환자들이 이곳에 모여 약을 사고팔았다. 인삼같은 고급약재와 희귀한 수입약재, 임금에게 진상하는 약재에 이르기까지 취급하지 않는 약이 없었다. 판매는 물론 조제도 담당했다. 정약용의 <경세유표>에서 모든 점포에서 세금을 징수하는데 약국만은 징수하지 않으니 불공평하다고 했다

     

    약재 유통 환경은 이처럼 발전을 거듭했지만 약재를 공급하는 사람은 여전히 호미를 들고 광주리를 짊어진 약초꾼이었다.이들은 범을 만날 위험을 무릎쓰고 약초를 찾아 산속을 헤맸다. 손에 넣는 돈은 입에 풀칠할 정도에 불과했다. 그래도 먹고 살 수 있는 직업이라는 점이 다행이었다. 19세기 서울의 남씨 노인은 약초를 캐고 버섯을 팔아 늙은 형수를 봉양했다고 한다. 형수는 일찍 죽은 부모 대신 그를 길러준 사람이었다

    댓글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