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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양 도성 밖 왕십리 채소밭에 여성 경영인의 채소전은 무엇인가
    아들을 위한 인문학/조선시대 직업들 2021. 12. 2. 04:52

    채소도(강세황)
    정약용과 목민심서

    내가 오랫동안 민간에 있으면서 보니, 농가에서는 채소를 전혀 심지 않아 파 한포기, 부추 한단도 사지 않으면 얻을 수 없다 < 정약용, 목민심서 >

    조선시대에 아무리 먹을 것이 귀했다지만 채소 정도는 실컷 먹었을 거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조선시대 농부들은 채소를 심지 않았다. 채소를 심을 땅도 없고 재배할 겨를도 없었기 때문이다, 벼농사와 채소 농사는 병행하기 어렵다. 채소 심을 땅이 있으면 곡식을 심는 게 낫다

     

    한양의 왕십리 위치
    왕십리 채소전 등

    한양 도성 내에서는 원칙적으로 농사를 금지했다. 게다가 한양 근처의 산은 마구잡이 벌채로 민둥산이 되었으니 산나물 따위가 남아 있을 리 없다. 한양 사람들이 먹는 채소는 모두 근교의 채소밭에서 재배했다. 당시 도성 밖이었던 왕십리의 채소밭이 가장 규모가 컸다. 왕십리의 백성은 항상 채소를 팔아서 생계를 꾸린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것을 도성 안으로 들여와 채소전에서 판매하거나 행상이 팔러 다녔다

     

    채소 행상 
    한양 시전 거리

    채소전은 한양 시전 가운데 여성이 운영권을 갖고 있는 몇 안되는 가게 중 하나이며 채소 행상도 대부분 여성이었다. 윤기의 <도성의 새벽 풍경>이라는 시에 별 지고 닭 울자 채소 할멈 젓갈 영감 다투어 도성에 들어오네라는 구절이 있다. 신윤복의 그림에도 생선 바구니를 머리에 이고 채소 바구니를 어깨에 멘 여성 행상이 등장한다

     

    동래부 성터

    초량과 부산 등지에 거주하는 왜인에게 채소를 파는 사람도 여성이었다. 왜인이 여성에게 값을 후하게 쳐 주었기 때문이다. 1708년 동래부사로 부임한 권이진은 마을 남자들을 불러 꾸짖었다. 듣자니 너희들이 아내와 딸을 보내 생선과 채소를 판다고 하는구나. 여인이 왜인의 손을 잡고 때리는 시늉을 하면서 이놈이 어찌하여 이렇게 값을 적게 주는가라고 말하면 왜인이 머리를 쓰다듬으며 어여삐 여기고 값을 후하게 쳐준다고 한다. 심지어 젊고 아름다운 여자가 파는 물건은 긴요하지 않아도 값을 갑절로 쳐준다고 한다. 이것은 생선과 채소를 파는 것이 아니라 네 아내와 딸을 파는 것이다. 너희들도 사람인데 어찌 차마 이런 짓을 하느냐

     

    개성 선죽교
    개성 지도

    한양만 아니라 큰 고을 주변에는 늘 채소밭이 있었다. 개성사람 김사묵은 선죽교 옆에 채소밭을 일구었다. 먹고 남은 것은 내다 팔았는데 채소가 귀해서 잘 팔렸다. 이렇게 번 돈으로 쌀과 고기를 사서 온 식구가 먹고살았다고 하니 제법 수지맞는 장사였던 모양이다

     

    채소값은 결코 싸지 않았다. 조선 후기 국가 조달 물자의 가격을 기록한 <물료가치성책>에서 50여종의 채소값을 확인할 수 있다. 배추 한근 가격이 쌀 두말, 파 한단이 쌀 한되, 상추 한단이 쌀 다섯 홉이다. 지금처럼 크고 좋은 것이 아니었을 테니 이정도면 귀한 음식이라고 하겠다. 채소 종자도 귀했다. 궁중에 채소를 납품하는 내농포의 채소 종자는 중국 가는 사신들이 진자점에서 구입해 온 것이었다

     

    조선 초기에 이미 온실을 설치해 겨울에도 채소를 재배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보통 사람들은 엄두를 내기 어려웠다. 채소가 귀하다 보니 염장이나 건조기술도 그다지 발달하지못했다. 조선후기 실학자 유수원은우리나라 사람들이 겨울을 나기 위해 보관하는 채소는 무김치가 고작이다. 산나물은 산골사람 외에는 보관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라고 했다. 유수원은 조선에도 중국처럼 전업으로 채소를 말려서 파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선후기 안산에 유덕상이라는 채식주의자가 있었다. 그는 만년에 채식을 하게 되었다는 뜻에서 호를 만채라고 했다. 역시 채식주의자였던 친구 이용휴가 그를 위해 글을 지어 주었다 < 내 친구가 호를 만개라고 짓고 채소를 밭에 심었다. 이것을 따서 삶아 먹기도 하고 생으로 씹기도 하며 살다 보니 세상에 고기가 있는 줄 모르게 되었다. 사람들은 고기를 먹고 싶어도 먹을 수 없으니 채소를 먹어야겠지라며 비웃는다. 하지만 그가 고기를 먹고 싶었다면 닭이나 돼지, 개를 길렀을 것이다. 만채의 채식은 본성이다. 동물을 도살하면 피와 살점이 낭자하다. 먹고 싶은 마음을 조금 참고 어진 마음을 베풀면 안 되겠는가. 고기를 먹어 오장육부에서 비린내와 썩은 내가 나는 사람과 채소를 먹어 향기가 나는 사람은 차이가 크다. 나 역시 아침저녁으로 채소 한 접시만 먹고 있다 >

     

    만채재기(이용휴)

    이용휴의 <만채재기>에 나오는 이야기다 조선시대 사람들이 채식을 했던 이유는 고기가 귀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함부로 생명을 해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채식이 건강에 좋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우리 음식 문화가 채식 위주였던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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