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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모(首母)인 신부 도우미이자 주례자로 주로 어떤 일과 보수를 받았나아들을 위한 인문학/조선시대 직업들 2021. 11. 1. 04:39
우리나라에서 혼인과 회갑 잔치에 쓰는 병풍, 탁자, 향촉 따위는 관청에서 빌리고, 그밖의 골동품은 상점에서 빌린다. 머리 장식, 가체, 비녀, 귀걸이, 가락지, 예복 등 꾸미는 물건은 장파에게 빌린다. 속칭 수모라고 한다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 수모는 수식모(首飾母)의 준말이다. 우리말에는 머리 어멈이고 지금의 헤어디자이너다 한편 화장과 의상도 담당했으니 메이크업 아티스트와 스타일리스트도 겸했고 혼례가 있으면 신부가 입을 옷과 장신구를 빌려주고 예식을 원활하게 진행하는 웨딩플래너 역할도 맡았다. 수모는 조선시대 혼례에 빠질 수 없는 존재였다. 조선시대 한양은 동서남북중 5부의 행정구역으로 나뉘었는데 수모는 구역별로 활동했다. 가례(왕실혼례)가 있으면 한양의 수모를 전부 대궐로 불러들였다. 행사에 참석하는 여성들의 머리 손질과 화장을 맡기기 위해서다. 궁중 여성들이 착용하는 가체를 손질하는 일도 수모가 도맡았다. 대궐에 모인 수모들은 나무빗과 솔로 가체를 다듬은 뒤 다시 염색하고 광을 내어 새것처럼 만들었다. 1759년 영조와 정순 왕후의 가례에 동원된 수모는 모두 25명이었다. 1788년 정조가 가체 사용 금지령을 내리면서 한양의 수모를 한 자리에 모았는데 33명이었다.
한양 부잣집은 단골수모를 지정해 두고 집안 여성의 몸단장을 전담하게 했다. 반면 시골은 수모를 구하기 어려웠다. 성호 이익은 시골에서 혼례를 치르면 한양의 수모를 불러오기 어렵다라고 했다. 수모가 한양에 몰려 있었기 때문이다. 경북 성주에 살던 이문건은 손녀의 혼례를 치르기 위해 청도에 사는 수모를 불러와야 했다. 청도 군수에게 협조를 요청하는 한편, 수모에게 뇌물을 주어 가며 달랜 끝에 간신히 허락을 얻어서 노비와 말을 보내 태워왔다
사치 풍조가 유행하면 수모가 제재를 받았다. 1541년 사치스러운 혼례를 금지한 법령에 신부가 청색과 홍색의 금실 두른 옷을 입으면 수모까지 죄를 묻는다라는 조항이 있다. 1788년 정조는 한양의 수모들을 모아 가체 사용을 금지하는 방침을 전달하고, 족두리를 착용하는 새로운 헤어스타일을 권장했다. 그러자 가체 대신 화려한 족두리가 유행했다. 정조는 칠보족두리 따위를 빌려주는 수모는 유배형에 처한다는 조항을 추가했다
사례는 얼마나 받았을까 ? 이익은 시골의 가난한 집에서 수모를 쓰려면 비용이 몹시 많이 듣다라고 썼다. 이문건은 수모가 집에 도착하자 쌀과 팥을 열말씩 주고 돌아갈 때는 무명 두필을 주었다. 모두 합쳐 쌀 두어 가마 값이니 적지 않은 금액이다. 수모에게 비단을주지 못하도록 금지하는 법령이 있었던 것을 보면 비단으로 주기도 했던 모양이다
이덕무의 <김신부부전>이라는 결혼식 기록에 의하면 신랑과 신부가 맞절을 하면 수모가 합환주를 마시게 한 다음 덕담을 하며 축복한다. 수모는 신부의 도우미 역할은 물론 신랑과 신부에게 조언하고 축복하는 주례 역할도 맡았던 셈이다. 전통혼례는 주례가 없지만 굳이 찾는다면 사회자에 해당하는 집사보다 수모가 주례에 가깝다. 조선 시대의 주례는 여성일 수밖에 없다. 외간 남자가 새 신부를 앞에 두고 훈계한다는 것은 당시의 도덕관념으로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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