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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사채업자로 고리를 뜯었던 식리인은 과연 어떤 인물인가아들을 위한 인문학/조선시대 직업들 2022. 10. 3. 04:00
근래 백성들의 폐단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사채가 특히 심하다. 흉년에 가난하고 초췌한 백성들이 먹고살 길이 없어 마침내 모두 부잣집으로 몰려가서 사채를 빌려다가 두배의 이자로 갚고 있다....만약 갚지 못하고 본인 먼저 죽으면 기필코 그 자손과 친족에게 거둔다 - 영조 승정원일기 - 가계 대출, 기업 대출 등 용어가 모든 매체에서 넘쳐 나고 있다. 은행 문턱이 높기만 한 서민들은 사채 시장으로 들어갈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조선 역시 대출 사업이 성행한 나라였다. 조선 초기부터 쌀이나 비단으로 대출 사업용 펀드인 대금을 조성했고 18세기부터 그 화폐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대출 조성 행위를 입본이라고 하고 대출 사업은 식리라 주로 했다. 대출 이자를 이식이라 하고 50%가 넘는 고금리를 장리라 불렀다
대출 사업자의 공사에 따라 공채와 사채로 구분했으며 해당 분야 전문가를 흥리인 혹은 식리인이라 불렀다. 성종실록에는 연행가는 사신들이 이들을 하인으로 가장시켜 데리고 가서 무역을 담당하게 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따라서 식리인은 상업 전문가에서 출발하여 점차 금융전문가로 분화된 듯하다. 말동, 김모자리, 검동과 같이 하인으로 추정되는 이름이 등장하는데 이는 식리인의 신분이 매우 다양했음을 보여준다. 조선 건국 초기부터 대출사업은 관에서 주도했다. 자방관들이 펀드를 조성하고 이를 민간에 대출하여 이자 수입으로 부족한 예산을 충당했는데 특히 지방의 방위비 조달을 위해 가장 많이 활용되었다. 부족한 지방 예산을 마련할 대안이 달리 없었으므로 지방관의 대출사업은 조선말기까지 성행했고 탐관오리와 민간인들의 결탁으로 많은 폐해를 낳았다
이 과정에서 대출 금리 책정이 가장 큰 문제였다. 조선 초기부터 어느 정도 예외는 있었으나 공채와 사채의 대출금리는 각각 20퍼센트와 50퍼센트가 일반적이나 사채의 고금리로 인한 갈등은 빈번했고 극단적인 경우 살인 사건도 발생했다. 한윤옥이 한명회의 사채를 거두는 과정에서 저지른 살인 사건과 윤필상이 의금부 나장을 시켜 사채를 독촉하여 받다가 발생한 살인 사건이 대표적이다. 결국 중앙 정부가 나서 경국대전에 대출금리가 연 20%를 넘지 못하게 규제하는 조항을 넣었다. 세종의 사위 윤사로를 비롯하여 한명회, 윤필상 등 고관대작들은 물론이고 승려, 생원, 진사의 자치 협의 기구 사마소도 사채업에 종사했다. 허생전의 등장인물 변승업 역시 사채업으로 많은 돈을 모은 것으로 추정된다
목민심서에 등장하는 전라 감영이 아전 최치봉은 대표적인 사채업자였다. 그는 전라도 쉰세 읍에 각 두세 명의 아전을 포섭하여 스스로 맹주가 되었다. 매년 수십만 냥을 조성하여 자신이 포섭한 아전들에게 나누어 주어 민간인을 대상으로 사채놀이를 하게 했다. 법을 잘 지키는 관리를 중상모략하고 탐관오리의 비리가 담긴 기록을 모두 빼내어 삭제해 주면서 자신의 위상을 세웠다. 그러던 중 전라감사에 의해 죄가 탄로나서 곤장을 맞고 결국 죽음을 맞이했다.
한편 자금의 대출자와 차입자를 연결해 주는 환도중이라는 사람이 있다. 환전거간으로 환도중의 중개를 통해 연 15%, 월 1.25%정도의 이율로 시변이라는 신용 대출이 이루어졌다. 조선시대 일반적인 금리가 연 50%정도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매우 저렴한 금리이다. 시변을 통해 급히 필요한 자금을 주로 확보했던 개성 상인은 송상이라고도 한다. 조선 초기부터 개성 사람은 관직에 진출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상업에 주력했다. 개성의 특산물 인삼은 곡물의 생산하는 것보다 15배의 이익을 볼 수 있었다. 의주를 통한 청나라와의 무역과 동래 왜관에 상주하는 일본인과의 무역에도 활발히 참여했다. 이들은 서양보다 200년이나 앞서는 독특한 복식 부기법인 사개치부법을 창안하여 활용했다
환도중의 조합대표와 거래자 대표는 매년 두차례 환도중의 동업조합 박물계 사무소에 모여 금리를 결정했다. 시변은 오늘날 은행간의 단기 거래에 적용되는 콜 금리와 비슷하며 금리를 결정하는 방식 역시 한국은행에서 기준금리를 결정하는 방식과 유사하다. 환도중을 비롯하여 시변의 대출자와 차입자는 모두 신용이 두터웠으며 별명을 사용했다. 일단 거래가 이루어지면 대출금 결제할 때까지 만날 일이 없었다. 일제 강점기 일본인들이 시변 거래에 세금을 매기려 했지만 방법이 없어 실패할 정도로 비밀 보장이 확실했다. 1912년 전후하여 개성의 식산은행, 한성은행과 같은 금융기관의 총 예금액이 100만원 정도였는데 환도중을 통한 시변의 유통액은 800만원에 달했다. 1939년까지 시변의 유통액이 연간 300만원 정도였다고 한다. 환도중은 금리결정도 주관했던 만큼 오늘날의 은행과 유사한 점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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