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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돌아오지 않는 명태, 생태, 노가리에 대해서
    아들을 위한 인문학/어류 2022. 8. 4. 04:29

    명태는 대구목 대구과에 속하는 한류성 어류다. 우리나라 동해 북부, 일본 북부, 오호츠크해, 베링해 등에 서식한다. 한때 동해를 대표하는 바닷물고기였다. 수심 수십미터에서 수백미터까지 서식하며 낮에는 1천미터까지 내려간다. 명태는 한 마리가 100마리 내외를 낳으며 알을 낳으면 인근에 수많은 물고기가 포식한다. 운이 좋아 깨어난 치어는 작은 새우와 오징어 등을 먹고 자란다. 4년이 지나면 40가 자란다. 명태는 잡는 지역, 잡는 방법과 시기, 크기, 가공상태에 따라 다양한 이름을 갖고 있다. 함경도에서는 명태, 조태, 왜태, 애기태 등 강원도에서는 선태,강태, 간태라고 했다. 서울에는 동태라고 하였다. 조선후기 실학자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 봄에 잡힌 것은 춘태, 겨울에 잡는 것은 동태, 동짓날에 시장에 나오는 것은 명란이라고 하였다. 또 크기별로는 명태새끼는 노가리로 20이하를 말한다. 그물을 잡히면 망태, 낚시로 잡히면 조태라고 하였다 건조상태에서 1개월 말린 것은 흑태이고 코에 꿰어 엮은 것은 코다리라고 하였다. 이렇게 다양한 방언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우선 가공과 유통, 보관에서 다른 생선과 비교할 수 없는 탁월함을 들 수 있다. 최근에는 강원대 대관령이나 미시령에서 겨울철에 러시아산 명태를 말려 황태라는 브랜드로 유통하고 있다

     

    명태가 문헌에 등장하는 것은 17세기에 이르러서다. 울산 출신 박계순 부자가 함경도 회령에서 근무한 것을 정리한 부북일기의 1645년 일기에 생명태가 등장하지만 공식적인 것은 승정원일기로 1652년 효종때 강원도 대구 알젓 대신 명태 알젓이 왔으니 관리에개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내용으로 명태가 기록되어 있다. 조선후기 문신 이유원 임하필기에는 명태의 이름과 관련해서 소개한다. 명천에 태씨 성을 가진 어부가 있었다. 그는 물고기를 잡아 도백에게 바치니 맛있어 이름을 물으니 아무도 알지 못하여 명천의 태씨가 잡았다하여 명태로 명명했다. 이 물고기가 해마다 수천 섬씩 잡혀 팔도에 두루 퍼졌다. 명태와 비슷한 것이 함경도에서는 망태라고 불렀다

     

    덕장

    함경도 명천에서 잡히던 생선이 남도 백성들의 밥상에 오른 것에는 아픈 사연이 있다. 17세기 이후 숙종과 영조대에 함경도는 이상기후로 흉년과 가뭄 등 자연재해가 잦았다. 그러자 전세, 공물, 진상을 면제해주었다. 그리고 남부지방의 쌀과 과 함경도의 명태를 교환한는 명태무역이 생겨난 것이다. 이것은 명태의 건조법이 있어서 가능했다. 비변사등록에 기록에 의하면 국가가 직접 나서서 명태를 싸게 팔거나 뱃값을 후하게 해주는 장려정책을 썼다. 명태무역은 각지를 퍼지고 사무역으로 발전했다 조선후기 실학자 서유구 전어지에 따르면 모든 물자는 원산을 거쳐 남으로 수송된다고 하였다 여기에 청어가 인기이었고 명태는 달고 따뜻하고 독이 없고 온화한 중에 기를 보태주는 효험이 있어서 좋아했다 명태의 몸통은 동건법으로 가공을 하고 알과 내장은 염장법으로 처리됐다.

     

    강원도 인제군 용대리에서 하는 가공법인 동건법이며 내장을 꺼낸 명태는 덕장에 널린다. 추위가 심하고 바람이나 눈이 많은 곳이 좋다. 날씨가 추위 명태 속의 수분이 얼고 다시 풀리면서 부풀어 푸석푸석해진 북어가 상품이다. 명태가 20번쯤 얼고 녹아 만들어진 것이 황태다. 황태에 이르지 못한 것이 먹태이다 한편 2014년부터 알밴 명태에 포상금을 걸고 명태 살리기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알을 인공수정해 어족 자원을 복원해보려는 시도였다. 그리고 2015년에 알밴 명태를 구하고 수정란 53만개를 부화했다. 일부는 강원도 고성에 방류하고 200마리를 키워 2세대 산란에 성공했다. 그러나 치어가 산란과 수정을 할 정도로 자랄때까지 적정온도와 먹이 등 서식 환경이 알려지지 않았다. 일본의 지리학자가 쓴 조선수산개발사에서 1901년 함경남도 연안 약 30리가 명태 주요어장이었다고 한다. 그곳의 신포 등 이며 어기가 다가오면 1000여척의 어선이 모여 1척당 2천마리 잡았다. 따라서 남북한이 194027만톤이 최고였다. 당시 총어획량의 16%에 해당되었다.

     

    해방 후 분단으로 원산 등 명태의 중심 어장을 잃어 어획량은 1만톤으로 줄어들었다. 꾸준히 줄어 1981년에는 10만톤으로 최고어획량을 한때 기록되기도 하였고 1970년에는 노가리잡이가 전면 허용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어획량의 90%가 노가리였다. 2007년에는 1만톤 이하의 어획량을 기록했고 정부는 명태 보호 차원에서 1996년에는 10센티미터를 2006년에는 27센티미터 이하는 잡지 못하게 했으며 2019년에 연중 어획이 금지되었다. 명태가 동해 어장에서 사라진 이유는 우선 수온 상승이라고 보고 있다. 치어를 방류하더라도 명태가 자라서 돌아오지 않아 정부의 명태살리기 프로젝트가 성공하지 못하였다. 두 번째는 남획으로 때문이다 러시아와 일본에서도 인근 해역에 어획량을 조절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명태는 산자뿐만 아니라 망자에게도 울리는 제물이었다. 동태포를 떠서 육전과 함께 생선전을 준비하는 것은 물론이고 탕에도 마른 명태를 찢어 넣었다. 당제나 풍어제 등 마을굿이나 개인 고사에 명태를 꼭 준비해야 하는 제물이었다. 경남 통영 사량도 남해안 별신굿에도 부산 대변항 동해안 별신굿에도 명태가 올랐다. 한편 명태는 신격을 부여하기도 했다. 집을 지을 터가 기가 세면 몰래 마당에 북어를 묻었고 뫼자리를 잡은 후 가묘를 할 때 북어를 대신 묻기도 했다. 전염병이 돌때는 북어 세 마리를 세줄로 일곱 번 묶어 상가의 추녀 밑에 묻었다. 명태가 사람 대신 액을 받는다고 믿었다. 강원도 화천에서 그해 죽을 운이면 성명 생일 주소를 써서 허수아비 대신에 북어를 오색 천으로 묶어 태웠다고 한다. 서해와 남해 일부 지역에서는 액막이로 짚으로 허수아비를 만들어 태우거나 바다로 띄워 보냈다. 새로 차를 구입했을 때도 돼지머리 등 제물을 준비하지 않더라도 북어를 놓고 안전운행을 빌기도 했다 고사가 끝난 뒤에는 무명 실타래로 감아 차안에 두기도 했다. 명태는 많은 알을 낳은 다산의 상징이면서 북어어 변신한 후 모습이 변치 않고 항상 두 눈을 뜨고 있어 귀신을 쫓아낼 것으로 신성한 존재로 본 것으로 여겨진다

     

    강원도 고성일때에서 잡힌 명태를 지방태라고 하며 예전 맛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다. 명태고기는 말할 것도 없고 알은 명란으로 내장은 창난젓으로 가공해 소비했다. 간장은 어유로 만들었고 작은 새끼마저 술안주 노가리로 만들어 먹어서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하였다. 한편 명태 만진 손을 씻은 물로 사흘 찌개를 끊인다는 말이 있는데 인색한 사람을 비꼬는 말이다. 북어 한 마리 부조한 놈이 제사상 엎는다는 말처럼 하찮은 것을 주고 지나치게; 생색을 내는 사람을 칭하기도 한다. 노가리 까지 마라는 쓸데없는 말을 많이 하지 말라는 말이다. 명태 한 마리 물고 딴전 본다는 말은 곁에 벌여 놓고 있는 일과는 전혀 상관없는 엉뚱한 일에 치중하는 사람을 두고 핀잔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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