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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정 수탈 속에 굶주린는 농민들이 일으킨 1863년 진주민란을 어떻게아들을 위한 인문학/한국사 2021. 12. 17. 04:36
1800년 정조의 뒤를 이어 11세의 어린 순조가 즉위했다. 그런데 왕위에 오른 순조가 너무 어렸으므로 영조의 계비였던 정순왕후 김씨가 섭정을 했다. 김대비가 수렴청정하는 동안 대비의 보살핌을 받은 외척 안동 김씨들은 세력을 형성하면서 정권을 쥐락펴락했다. 특히 계비의 후광을 얻고 등장한 김조순은 그의 딸을 순조에게 시집보내고는 왕의 장인이 되어 정권을 쥐었다. 김조순을 비롯한 안동 김씨들이 권력을 독차지하는 동안 중앙이건 지방이건 부정부패가 질펀했고, 탐관오리들이 날뛰었다. 이후 순조, 헌종, 철종 3대 60여 년간 안동 김씨 가문이 모든 권력을 손아귀에 틀어쥔 세도정치가 이어졌다
조선시대 나라의 주요 재정 수입원은 전정, 군정, 환곡의 이른바 삼정이었다. 조선시대 양반들은 토지세와 군복무의 의무를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이 삼정은 지방관리의 속임수 등으로 갖가지 부패의 온상이었다. 세도정치 시기에 와서 정치가 어지러워지자 삼정의 부패와 따른 폐해는 더욱 심해졌다. 흉년이 들어도 지방수령들은 농민들에게 풍년 때와 똑같이 세금을 매겼다. 16세에서 60세까지의 남자들은 군역의 의무를 지고 있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군대에 나가는 대신 베나 돈을 갖다 바쳤다. 그런데 이 시기 서리들은 군역을 늘리려고 뱃속에 있는 아이에게까지 군포를 매기는 등 착취를 일삼았다. 이 군포에 대해 폐해는 삼정문란 중 가장 심했다
환곡은 봄철 보릿고개에 농민들에게 곡식을 빌려주었다가 가을철에 갚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의도와는 달리 농민들에게 피해만 줄 뿐이었다. 강제로 곡식을 빌려주고는 높은 이자를 물게 하는식이니 농민들은 어쩌지 못해 농토를 버리고 유랑할 수밖에 없었다. 내일이 없는 농민들은 마침내 고향을 버리고 산속에 들어가 화전민이나 산적이 되거나 그도 아니면 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마침내 전국에 큰 흉년이 들었던 1811년 홍경래란을 기점으로 1862년까지 70여개 군 이상에서 농민들이 들고일어났다. 1863년 2월에 일어난 진주민란은 관리들이 부정부패에 더 이상 견디지 못한 농민들의 대표적인 항거였다. 진주민란은 우병사 백낙신의 지나친 탐욕과 착취가 그 원인이었다. 주모자인 유계춘은 몰락한 양반출신인 이계열을 부두령으로 삼고 민란을 이끌었다. 2월 14일 새벽 분노한 농민들은 머리에 흰 수건을 동여매고 각자 손에 몽둥이를 움켜 쥔 채 모여들었다
진주민란은 우하는 구호와 함께 노래를 부르며 휩쓸었다하여 진주우통이라고도 한다. 진주민란은 급기야 인근의 단성, 함양, 거창에 영향을 주었고 이에 민란의 물결은 삼남 각지로 퍼져나갔다. 정부는 박규수를 진주 안핵사로 파견하여 무마케 했으나 민란은 3개월 이상 삼남지방을 휩쓸었다.
농민대중의 봉기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자 정부는 사태를 수습하고자 노력했다. 민란의 원인인 삼정의 문란을 바로잡고자 이청정을 신설하고 전국의 관리들에게 시정책을 올리도록 했다. 그렇지만 민란에 대한 근본적인 시정책은 세우지 못했다.
삼정문란으로 발발한 19세기 민란은 동학이라는 보다 분명한 이념과 조적을 갖고 발생한 갑오농민전쟁으로 이어졌다. 이 같은 민심의 떠남은 곧 왕조의 멸망을 뜻하는 조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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