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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5.16 군사쿠데타로 시작되는 군사문화는 어떻게 전개되었나아들을 위한 인문학/한국사 2021. 9. 16. 04:56
4월혁명으로 이승만이 실각한 후 3개월후간의 허정 과도정권을 거쳐 1960년 7월 내각책임제하의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대통령의 독주와 독재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총선 결과 한민당의 맥을 이은 민주당이 정권을 잡았다. 국무총리를 비롯한 각 부 장관자리를 두고 신구파의 분란을 겪던 민주당은 가까스로 장면내각을 출범시켰다. 그러나 우유부단한 장면내각은 4월 혁명 이후 국민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정치를 해나가지 못했다. 무능과 부패에다 이전의 독재정치를 너무 의식한 나머지 지나칠 정도의 자유를 허용한 제2공화국은 가히 가두데모 공화국이라 할 만했다. 장면정권은 군부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다. 70만 병력을 40만으로 감축하겠다고 하는 등 대대적인 군축 조치를 취하려 했다. 그러던 중 육사 8기 출신들을 중심으로 군부숙청에 관한 하극상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의 주모자로 지목된 김종필과 김형욱 중령은 예비역으로 편입되었고 박정희 소장은 뒤에 관련 혐의로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에서 2군부사령관으로 좌천되었다. 마침내 좌처넹 대한 불만을 쿠데타로 이어졌다.
1961년 5월 16일 새벽 박정희의 주도하에 수천명의 군인들이 탱크를 앞세우고 한강을 건너 서울시내로 들어닥쳤다. 정부청사인 중앙청이 이들에게 넘어가고, 새벽 5시 혁명군이 국가의 실권을 장악했다는 군사혁명위원회의 라디오 방송이 이어졌다. 갑작스런 군인들의 봉기소식을 접한 장면 총리는 급히 시내의 한 수녀원으로 몸을 피해 종적을 감췄다. 거칠 것이 없었던 군사혁명위원회는 곧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정을 시작했다. 표면적인 혁명회의 의장은 육군참모총장 장도영이었지만 실세는 부의장 박정희와 그 측근세력이었다. 이들은 곧바로 국민들에게 혁명공약을 제시했는데 특히 반공을 국시로 삼는다는 사실을 유난히 강조했다. 그 외 자유우방과의 유대강화, 부패일소, 자주경제 재건, 통일을 위한 노력 등을 제시했다. 군사혁명위원회는 곧 국가재건최고회의로 바뀌고 박정희는 이 기구의 의장이 되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이때 박정희는 미국을 방문하여 경제개발에 필요한 지원을 얻는 대신 한일회담 추진하고 베트남 파병을 약속했다. 최고회의는 국가재건비상조치법을 만들어 모든 정당을 해산하고 장면 정부 지도자들을 체포하는 등 군인 특유의 강압적인 통치를 해나갔다. 쿠데타 세력들은 군의 내건 과업만 완수하면 곧 군 본연의 임무로 돌아갈 것이라 공약했지만 중앙정보부를 만들어 통치준비에 착수함으로써 거짓임을 드러냈다. 그리고 1962년 12월 강력한 대통령 중심제와 국회단원제를 중심으로 한 새 헌법을 만들었다. 1963년 그들은 사전조직이라는 비난을 무릎쓰면서 민주공화당을 창당함으로써 박정희를 비롯한 많은 군인들이 군복을 벗고 본격적인 정치인으로 탈바꿈했다.
1963년 10월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는 야당의 후원을 받은 윤보선을 아슬아슬한 표차로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 이로써 군사정권인 제3공화국 탄생했다. 박정희는 이후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에 의해 사망하기까지 3선 개헌과 유신헌법을 통해 독재권력을 누렸다. 5.16쿠데타를 일으키고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자립경제와 조국근대화를 달성한 후 승공통일한다는 선건설과 후통일론을 내세워 통일운동을 억압했다. 경제개발을 가장 우선적인 목표로 내걸고 자본주의 체제를 지향했다. 그런데 경제개발 정책에는 제 3세계국을 자본주의 체제 내로 묶어놓으려는 미국의 의도가 깔려있었다. 군사정권은 이러한 미국의 동북아 전략구도에 발맞춰 국내의 엄청난 반발에도 불구하고 한일국교정상화와 베트남 파병을 추진했다. 이로써 군사정권은 친미반공 보수세력으로서의 자기 색깔을 뚜렷이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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