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몇 번이고 되살아난 영원의 도시인 로마에 대해서 알아보면
    아들을 위한 인문학/세계 도시 2023. 12. 21. 03:55

    400만명 이상이 거주하는 로마는 역사상으로 최고의 영화를 누렸던 제국의 수도답게 당대의 최고기술을 활용해서 상하수도와 공중목욕탕을 건설했다. 이러한 시설은 무엇보다 로마 시민의 생활을 윤택하게 만들었다. 로마제국이 붕괴된 후에 로마는 카톨릭교회의 소재지로 규모와 지위가 축소되었지만 르네상스 시대에 또 다시 화려한 문화를 꽃피웠다. 로마는 이탈리아반도 서쪽에 펼쳐진 지중해 중부 티레니아해로 흘러드는 테레베강의 하구에서 25km쯤 거슬러 올라간 동쪽 강가에 위치한다. 로마의 건국신하에 따르면 테베레강에 버려진 쌍둥이 형제 로물루스와 레무스가 마을에 정착한 후 로물루스가 레무스를 제거하고 팔리티노 언덕에서 기원전 753년에 로마를 세웠다고 전해진다. 로마는 로물루스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실제로는 기원전 10세기 팔라티노 언덕에 라틴인이 집략을 형성한 것이 로마의 시초다. 기원전 7세기가 되자 이탈리아 중부지역을 거점으로 삼은 에트루리아인이 세력을 확장했으며 왕위를 이었갔다, 이들은 고도의 금속가공기술과 토목기술을 갖고 있었다. 이들은 언덕에 광장을 만들어 그곳에 신전과 집회소를 세웠다. 하수도를 정비하고 약 10km에 달하는 세르비우스 성벽을 쌓아 도시를 에워싸기도 했다. 공화정, 제정 로마의 수도다운 도시구조의 원형이 이 무렵에 만들어진 것이다

     

    로마에는 건국시기부터 지도자층의 입법 자문기관인 원로원이 존재했는데 기원전 509년에 원로원과 협의없이 제멋대로 권력을 휘두르던 에트루리아인 왕이 분노한 로마시민들에 의해 추방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리고 로마공화정이 시작되었다 내정이 안정되자 로마공화정은 기원전 272년에 이탈리아반도를 통일하고 지중해지역으로 진출했다. 그리고 점령한 각 지역에 속주를 설치했다. 공화정시대에 로마는 인프라를 정비하며 적극적으로 도시개발을 추진했다. 테베레강 가에는 항만시설과 밀 저장고를 지었다. 이 건물들은 천연 시멘트를 이용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콘크리트 건축물이다. 기원전 312년에는 정치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에 의해 전체 길이 16.5km에 달하는 로마 최초의 수로 아피아 수도가 건설되었다. 이후에도 로마는 도시의 확장과 함께 상하수도를 계속 증설하였다. 로마를 중심으로 각지에 방사선 모양으로 뻗은 군용도로인 아피아 가도도 클라우디우스가 감독해서 건설한 것이다

     

    기원전 88년 이탈리아반도 전역의 자유민에게 시민권이 부여되었고 평민의 발언권이 커졌다. 이때 로마는 도시국가에서 로마와 동등한 권리를 가진 도시들을 포함하는 영역국가가 되었다. 한편 원로원에 속한 귀족과 평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호민관의 대립하였는데 이 시기를 내란의 1세기라고 하였다. 술라를 비롯한 귀족들은 권력과시를 위해 유피테르신전과 국가 공문서관 등 공공건축물을 짓고 로마의 도시경관을 바꾸었다. 호민관인 마리우스와 원로원 귀족 술라의 사후 카이사르, 폼페이우스, 크라수스가 삼두정치를 실시했고 그 뒤 카이사르가 독재정치를 펼쳤다. 하지만 2년 후에 카이사르가 암살되자 양자 옥타비아누스가 권력을 장악했다 그리고 기원전 27년에 초대황제로 등극하여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되었고 로마는 공화정에서 제정시대로 이행했다

     

    아우구스투스는 벽돌로 지어진 로마를 이어받아 대리석의 도시로 남긴다라고 말했다.그는 의사당, 신들을 모신 판테온, 극장과 같은 건축물의 건설사업을 벌이는 한편 로마를 14구를 나누는 등 도시정비를 추진했다. 로마 대화제 이후 재건된 판테온은 약 2000년이 지난 지금도 건재하였다. 5만명을 수용할 수 있었던 원형경기장 콜로세움은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착공 되어 기원후 80년에 티투스 황제 때 완성되었다. 이곳에서 로마시민은 검투사 노예들의 싸움을 관람했다. 이 무렵 로마의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기원전 300년경 3만명 정도였던 인구가 기원후 14년경에는 80만명이고 164년경에는 100만명 이상으로 증가했다. 급격하게 늘어난 인구로 인해 로마시는 세르비우스 성벽 밖으로 확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3세기 아우렐리우스 황제 때는 세르비우스 성벽의 바깥에 시가지를 에워싸듯이 전체 길이 19km의 아우렐리우스 성벽을 새롭게 축조하여 신시가지를 완성했다. 거대도시로 형성된 계기는 수도가 갖추어졌기 때문이다. 기원전 312년 아피아 수도를 필두로 해서 기원후 226년 안토니니아나 수도까지 총 11개의 수도를 건설했다. 이물은 식수와 공중목욕탕으로도 공급되었다. 4세기 로마에는 목욕탕이 900개 정도되었다. 귀족은 넓은 부지의 단독주택 도무스를 소유했고 평민은 인술라라는 7층 고층 공동주택에서 살았다.

     

    로마는 오현제 시대에 팍스로마나(로마의 평화)라 불리는 최전성기를 맞았다. 트라야누스 황제 때는 서유럽의 대부분을 차지했고 남쪽으로는 북아프리카대륙, 동쪽으로 메소포타미아까지 판도를 확장했다. 하지만 이 시대를 정점으로 로마는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오현제 이후 50년간 18명의 군인 출신 황제가 번갈이 황위에 오르는 군인황제 시대를 거치며 내정이 몹시 불안했다. 이 상황에 종지부를 찍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이대로 광대한 영토를 통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293년에 로마제국을 동서로 나눠 각각 정부황제를 두는 사두정치체제를 시작했다. 그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제국을 재통일하고 수도를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로 옮겼다. 이때부터 콘스탄티노플은 제 2의 로마로 불리게 되었다. 또한 313년에 반포한 밀라노칙령에 따라 로마제국에서 그리스도교가 공인되었고 392년에는로마의 국교로 제정되었다. 395년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죽기 전에 두 아들에게 영토를 나누어주었고 밀라노를 수도로 하는 서로마제국과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하는 동로마제국(비잔티움제국)이 성립했다. 이제 로마는 서로마제국에 속한 한 도시로 전락했다. 이 무렵 서로마제국은 게르만의 대이동으로 인해 혼란이 계속되었고 로마도 역시 그 영향을 받았다. 410년에는 게르만계 서고트족에게 약탈을 당했고 455년에는 역시 게르만계인 반달족에게 건축물과 인프라 설비가 파괴되는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476년 결국 서로마제국은 멸망한다. 8세기 중반 로마가 게르만계 랑고바르드족의 위협에 노출되자 로마교황은(4세기부터 사용) 동로마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고 게르만족인 프랑크왕국에 도움을 청했다. 이에 피핀 3세는 로마를 침략한 랑고바르드족을 격퇴하고 획득한 영지를 로마 카톨릭교회에 헌납했다(756) 이로부터 로마는 로마교황령의 중심도시가 형성되었다

     

    9세기에 프랑크왕국이 분열하고 이탈리아왕국이 성립했지만 이탈리아왕국은 약 80년만에 붕괴했다. 신성로마제국의 지배하에서 베네치아와 제노바 등의 도시가 번영하는 한편 교황령은 독립을 유지했다 이런 와중에 로마시에 있는 콜레세움과 극장은 이교와 관련한 건축물이라는 이유로 방치되었다. 중세시대에 로마는 교황과 각국 군주와의 투쟁으로 농락당한다. 13세기 교황 인노첸시오 3세 시대에 교황의 권력은 절정을 맞지만 14세기에는 프랑스왕에 의해 교황청이 강제적으로 이전할 정도로(아비뇽유수)교황의 권위가 추락했고 로마도 피폐해졌다. 한편 14세기 이탈리아반도에서 고전문화부흥 르네상스가 시작되어 로마도 영향을 받았다. 현재 로마에서 볼 수 있는 교회나 교회를 장식한 회화와 벽화 등의 예술작품이 탄생한 것도 이 시기다. 2만명 남짓했던 인구도 5만명으로 증가했다. 잠시 고대 로마와 같은 번영의 분위기가 되살아난 듯했지만 로마는 1527년에 신성로마제국 군대의 공격을 받게 된다. 유럽의 정치적 알력 속에서 교황 클레멘스 7세와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가 대립한 것이 배경이었다. 그 무렵 가톨릭교회는 로마 부흥의 상징인 성베드로대성당을 재건을 계획하면서 막대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면죄부를 남발했다. 이에 반발하여 루터의 종교개혁을 촉발하며 그의 가르침을 신봉한 신성로마제국의 병사들은 로마를 무차별적으로 약탈하고 파괴했다.

     

    18세기 말에 유럽은 크게 변동한다 프랑스혁명을 계기로 전격 등장한 나폴레옹이 황제에 오르고 세력을 확대했다. 1809년에 교황령은 프랑스제국에 일시적으로 병합된다. 프랑스혁명의 영향으로 이탈리아반도에서는 통일운동이 활발해지고 1861년에 사르디나아공국이 이탈리아왕국을 수립했다. 수도는 토리노, 피렌체를 거쳐 1870년 왕국에 병합된 로마로 정해졌다. 이 무렵 로마의 인구는 약 20만명이었고 시설이 부족해서 왕국 정부는 청사, 병원, 공원과 같은 공공시설의 건설을 급속하게 추진했고 새로운 도로를 정비하는 등 구획정리를 실시했다. 1918년에 1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후 이탈리아에서는 파시스트당의 독재정치가 시작되었다. 정권을 장악한 무솔리니는 로마의 근대화를 내세우며 로마 개조계획을 가동했다. 그후 1936년에 인구가 100만명을 돌파했다. 1939년에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이탈리아는 문화재 보호를 주목적으로 로마, 피렌체, 베네치아 등 세 도시를 교전의 의도가 없다는 무방비도시로 선언했다. 이덕분에 로마는 독일군에 점령당했지만 파괴를 면할 수 있었다. 1945년에 전쟁이 끝난 후 이탈리아는 왕정을 폐지하고 다음해에 공화정 국가가 되었다. 로마는 영원의 도시로 불린다. 여러 차례 침공을 받아 파괴되었지만 재건과 발전을 거듭해왔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불리는 것이다.

     

    가톨릭교회의 총본산이 위치한 도시국가 바티칸의 면적은 0.44의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로 알려져 있는 도시국가 바티칸의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는다. 1926년 이탈리아와 로마교황청 사이에 라테라노 조약이 체결되어 국가로서 독립을 승인받은 후 그 역사가 시작되었다. 바티칸의 국가원수는 로마교황이다. 초대교황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첫 번째 제자인 성 베드로가 추존되었다. 사실 바티칸시 자체의 역사는 매우 유구하다. 756년에 카롤링거왕조의 피핀 3세가 바티칸을 포함한 라벤나 지역을 헌납했을 때부터 로마 가톨릭교회의 총본산으로 자리 잡은 긴 역사를 가졌다. 394년 성 베드로의 묘 위에 성당이 세워졌고 그 후 여러차례 개축되었다. 이곳이 세계 최대의 그리스도교의 건축물인 성베드로대성당이다. 이 대성당 옆에는 바티칸궁전이 있는데 여기에 로마교황이 거주하고 있다

    댓글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