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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폴리스와 민주정으로 발전한 도시 아테네에 대해 알아보면
    아들을 위한 인문학/세계 도시 2023. 7. 18. 03:19

     

    아테나와 포세이돈의 대결

    고대 그리스 신화에는 올림포스 12신 중 지혜의 여신 아테나와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 한 도시의 수호신 자리를 놓고 다투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주민은 아테나를 선택했고 이에 따라 도시는 여신의 이름을 따서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그 도시가 그리스공화국의 수도 아테네다. 에게해를 중심으로 한 고대 그리스세계에서는 발칸반도 남부의 미케네문명이 기원전 1600년부터 발전을 이루었다가 기원전 1200년경에 갑자기 붕괴했다 그후 미케네문명을 이룬 사람들은 기원전 8세기에 그리스 각지에 폴리스라로 불리는 도시국가를 건설했다. 아테네도 그중 하나다. 그리스는 산맥과 섬이 많은 지형인 데다 큰 강도 없어서 서로 교류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여러 폴리스는 통일국가로 합쳐지지 않고 교역에 유리한 연안부를 중심으로 독립적으로 발달했다. 아테네는 특히 대리석과 은 등 자원이 풍부했다

     

    고대 아테네 도시
    파르테논신전(아테나 여신전)
    페르시아 전쟁

    각 폴리스는 오르기 쉽고 군사 요충지로 적합한 고지대, 즉 방어의 거점과 성지의 용도를 겸한 언덕을 아크로폴리스(j덕 도시, 파르테논 신전이 있는 아테네의 언덕)로 정했다. 아테네는 구릉지와 평탄한 토지가 공존하는 기복이 많은 땅이어서 중심부 언덕이 아크로폴리스가 되었다. 기원전 6세기 이곳에 파르테논신전이 건립되었다. 그 이름은 아테나가 파르테노스(처녀)였던 데서 유래했다. 이 신전이 지어졌을 무렵 아테네는 귀족과 평민이 항쟁하는 정치적인 과도기였다. 기원전 8세기에는 당시 정권을 잡은 귀족이 평민과의 대립을 조정하기 위해 법률 정비와 국정개혁 등 민주정치의 기틀을 잡아가고 있었다. 같은 시기에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주변지역의 오리엔트 지역을 통일한 대제국 페르시아는 많은 폴리스를 지배하고 있었다. 거기에 이오니아 반란을 도화선으로 기원전 500년경 전쟁을 시작했다. 아테네는 반란을 일으킨 폴리스들을 지원함으로써 페르시아와 대립했다. 그리고 기원전 490년에 아테네 중심의 폴리스연합군이 마라톤전투에서 승리한다 이 전투에서는 자비로 참전한 시민들로 구성된 중장보병 부대의 팔랑크스(밀집대형)이 상당한 효과를 발휘한다

     

    그리스 삼단노선
    삼단노선 원리

    때마침 아테네 근교의 라우리온에서 은 광맥이 발견하여 그 수익으로 최신예 전함인 트리에레스(삼단노선)를 건조했다. 그리스 해군은 기원전 480년 살라미스해전에서 페르시아 함대를 격파했다. 이때 노꾼으로 무산계급 시민이 활약했고 이후 이들의 발언권이 점차 커졌다. 이를 계기로 더 많은 시민이 정치에 참여하게 되어 민주정치의 확립이 가속화되었다. 페르시아 전쟁 후 아테네는 재침공에 대비한 폴리스들의 군사동맹인 델로스동맹의 맹주가 되어 그리스세계에서 발언권을 키워나갔다. 한편 아테네는 아크로폴리스를 중심으로 형성되었고 그곳에서 북서쪽 기슭에는 아고라(광장)이 건설되었다 아고라는 모이다라는 뜻으로 많은 사람이 모이는 시민생활의 중심지를 의미한다. 초기의 아고라는 시장이었지만 많은 사람이 모이면서 점차 시민들의 정치토론장으로 변모했다. 정치색이 강한 아고라에는 현대의 국회의사당에 해당하는 건물이나 시청사 그리고 재판소와 같은 공공관청이 세워졌다. 또 국가정책을 결정하는 민회는 아크로폴리스 서쪽에 위치한 프닉스 언덕에서 열렸다 지금도 정치가들이 연설을 하던 연단이 남아 있다. 아테네 도시는 길이 좁고 비뚤비뚤하고 살림집은 보잘 것 없었서 전쟁보다는 전염병으로 더 많은 사망자가 나왔다 그리고 1.5km 사방의 시가지를 둘러싼 성벽 바깥에 펼쳐진 농경지는 시민이 노예를 부려서 운영했다. 총인구는 25만명이 이었고 1/3의 노예가 가사일이나 은광 채굴에 종사 이들을 통해 아테네가 유지되었다

     

    디오니소스 극장

    기원전 5세기경 아네테는 소크라테스, 플라톤과 같은 위대한 철학자를 배출했고 주변 각지에서 지식인들이 몰려와 학문의 도시로 발전했다.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마케도니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교육을 맡은 후 아테네로 돌아와 학당을 열었다. 아테네와 인연이 깊은 아리스토텔레스는 방대한 학문을 집대성했고 그 사상은 이슬람철학과 중세유럽의 철학 및 신학에도 영향을 미쳤다. 한편 아크로폴리스 기슭에 위치한 디오니소스 극장은 민회장으로 연극이 상영되었으며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었다 한편 고대 그리스 건축양식은 대체적으로 힘차고 장엄한 느낌이 특징인 도리아식, 우아한 소용돌이 모양이 특징인 이오니아식, 화려한 장식이 특징인 코린트식으로 나뉜다. 파르테논신전은 도리아식을 대표하는 건축물이고 기둥의 가운데 부위가 약간 불룩하게 나오도록 한 엔타시스 양식이고 이오니아식은 고대 로마의 건축양식에 영향을 주었다

     

    펠로폰네소스전쟁

    아테네는 델로스동맹의 맹주로서 폴리스들을 이끌었지만 펠로폰네소스동맹의 맹주인 스파르타와 싸운 펠로폰네소스전쟁(기원전 431-404)에서 패한 뒤 국력이 크게 쇠약해졌다. 이러한 그리스세계의 혼란을 틈타 필리피스 2세가 이끄는 마케도니아구닝 북방에서 침입했고 이에 맞선 폴리스연합군은 카이로네이아전투(기원전 338)에서 패했다. 이후 스파르타를 제외한 폴리스들은 필리포스 2세의 주도하에 코린토스동맹을 체결하고 마케도니아왕국의 지배하에 놓이게 된다. 세력을 확장한 마케도니아 왕국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사후에 분열했다. 기원전 168년에 로마군에 의해 멸망하고 그리스 영토의 대부분은 로마제국의 속주가 되었다. 융성한 로마제국은 기존 건물을 고치거나 공공건축물을 새로 건설했으나 그리스도교가 널리 퍼지면서 도시의 신전들이 파괴되었고 6세기에는 동로마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1세에 의해 철학 학원이 폐쇄되었다. 이로써 학술과 문화의 중심이었던 아테네의 영광은 점차 잊히게 된다. 이후 아테네는 십자군 국가와 오스만제국과 같은 강국들의 지배를 받았다. 하지만 독립전쟁을 거쳐 1830년에 오스만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그리스왕국으로서 독립을 이루었다. 1975년을 거쳐 왕정과 공화정을 거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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