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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럽과 아시아가 맞닿은 요충지인 콘스탄티노플에 대해서
    아들을 위한 인문학/세계 도시 2024. 3. 14. 03:19

     

    시대의 변화에 따라 도시의 이름이 바뀐 곳이 많다. 그중에서도 현재 튀르키예에 있는 이스탄불이 있다. 15세기에는 콘스탄티노플로 4세기에는 비잔티움이라고 로마시대에는 노바 로마라고 하였다. 흑해와 에게해를 잇는 보스포루스해협에 인접한 이스탄불은 옛날부터 유럽과 아시아가 맞닿은 요충지였다. 기원전 658년 그리스 메가라족의 비자스왕은 보스포루스해협의 유럽 쪽에 상륙한 뒤 식민도시 비잔티움을 건설했다. 이후 페르시아의 지배를 거쳤고 기원전 4세기 이후에는 자치도시로 성장하고 기원전 1세기에 로마제국의 세력권으로 편입되었다. 3세기 말 로마제국에는 방대한 영토를 동서로 분할해 각각 정제와 부제가 지배하는 사두정치 체제가 도입되었다. 330년에는 비잔티움으로 수도를 옮기겠다고 선언하기까지 했다. 이 무렵 로마제국 경제의 중심지는 사실상 동쪽으로 옮아간 상태였다. 또 콘스탄티누스 1세는 그리스도교 신자였다. 전통적으로 다신교신앙이 뿌리 깊은 로마를 벗어나고자 했다

     

    발렌스 수도교

    새로운 수도의 건설에 따라 주요 건축물이 로마 시내의 일곱 언덕을 본뜬 일곱 군데의 언덕에 배치되었다. 도심 중앙에 건설한 콘스탄티누스 광장을 기점으로 도로망도 정비되었다. 한편 콘스탄티노플은 바다로 둘러싸여 있어 담수를 얻기 어렵다는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식수확보를 위해 광장 지하에 거대한 저수조를 만들었다. 375년경에는 도심과 서북쪽 숲에 있는 수원을 잇는 발렌스 수도교가 설치되었다. 높이 약 20m 길이 1km가량의 이 다리는 19세기까지 약 1400년간 사용되었다. 4세기 말에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본격적으로 콘스탄티노플을 정비했다. 성벽과 항만을 건설하고 성벽에는 도시의 현관문과 같은 황금문을 만들었다. 이 시대에 그리스도교가 로마제국의 국교로 인정되었다.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삼위일체설이 정통으로 인정받았다 그 사후에는 로마제국은 동서로 분열되고 콘스탄티노플은 동로마제국의 수도가 되었다. 서로마제국은 476년에 멸망해 간 반면 콘스탄티노플은 인구가 계속해서 늘어나 번성했다

     

    7세기경 동로마제국에서는 지배계급과 주민 모두 로마인이 아닌 그리스인이 대다수를 차지하면서 그리스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게 되었다. 동쪽의 이슬람세력과 충돌을 반복하면서도 지중해 무역의 거점으로서 계속 번영했다. 고대 그리스철학과 그리스도교를 융합시킨 독자적인 신학, 그리스의 조각이나 회화와 그리스도교의 미술이 융합한 비잔틴미술이 발달했다. 8세기에 들어서자 유럽 각국에 영향력을 가진 로마교회와 콘스탄티노플교회가 교리 해석을 둘러싸고 충돌했다. 결국 11세기에 로마 카롤릭교회와 동방정교회의 분열이 발생했다. 이후 유럽에서 십자군 원정이 시작되자 베네치아와 제노바의 상인들이 지중해의 운항과 통상을 주도했다. 이들은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한 동로마제국의 재해권과 무역이권을 위협했다. 1204년에는 베네치아 상인에게 선동당한 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라틴제국이 건국되었고 동로마제국은 아나톨리아반도에 있는 니케아로 옮겨갔다가 1261년에 다시 탈환했다. 이런 와중에 이슬람세력인 투르크계의 셀주크왕조가 침공하자 동로마제국은 급속히 쇠퇴했다

     

    신성로마제국과 오스만제국
    아흐메트 모스크

    14세기 지중해 동부에서는 셀주크왕조가 무너지고 오스만제국이 세력을 확장했다. 오스만제국의 메메트 2세는 1453년 약 8만명의 군사를 이끌고 콘스탄티노플을 공략해 점령했다. 1457년부터는 이스탄불로 호칭이 변경되었고 그리스도교회를 모스크로 고쳤고 소피아성당에 있던 그리스도상 모자이크와 회반죽으로 덧칠해졌다 1478년에는 황제가 모무는 톱카프궁전이 완공되었다. 이는 중동과 유럽의 건축양식이 섞인 독특한 건물이 되었다. 오스만제국은 지중해와 발칸반도의 패권을 둘러싸고 신성로마제국과 대립하며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다. 이 때문에 프랑스에서 도입한 바로크양식의 장식이 사용되었다. 오스만제국의 최전성기를 구축한 술탄은 1520년에 즉위한 술래이만 1세다. 명소로 꼽히는 술래이마니에 모스크로 1557년 이스탄불의 중심부에 건설되었다. 1616년에는 천재 건축가 시난의 문하생인 메메트아아가 건축을 담당한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가 완성되었다. 여기는 여섯 개의 첨탑이 있는데 이는 이슬람의 중심이 메카가 아닌 이곳임을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 보통 첨탑은 4개로 구성되어있다

     

    터키 공화국
    소피아성당(동서양의 문화 흔적)

    17세기 이후에 서구국가들의 주요 교역활동 무대는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옮아갔다. 지중해 도시의 중요도는 낮아졌지만 이스탄불은 중동 진출의 거점으로서 주목받았다 1883년에는 이스탄불에서 독일의 뮌헨, 프랑스의 파리를 잇는 오리엔트 급행열차가 운행되기 시작했다. 오스만제국이 1차 세계대전에서 패하자 영국, 프랑스, 그리스 등 연합국이 이스탄불을 점령했지만 케말 등이 이끄는 국민군이 연합군을 물리쳤다. 황제의 권위는 실추되었고 오스만제국은 해체되었다. 1923년 터키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수도는 앙카라로 옮기면서 수도를 자리를 내주었다. 이스탄불은 로마제국에서부터 오스만제국까지 각 시대의 건축물이 한데 모여있다. 흑해에서 지중해로 나가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선박 등을 포함해 보스포루스해협에서는 연간 4만척의 배가 운항하고 있다. 1973년에는 이스탄불의 유럽지구와 아시아지구를 잇는 전체 길이 1560m의 보스포루스 대교가 완성되었고 2011년에는 유라시아 해저터널도 개통되었다 지금도 이스탄불은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교통상의 중요한 요충지 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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