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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헬레니즘문화가 탄생한 학술의 도시 알렉산드리아에 대해서 알아보면
    아들을 위한 인문학/세계 도시 2023. 9. 5. 04:09

     

    알렉산드리아라는 이름을 딴 도시는 고대에 시리아, 페르시아만, 인도 서부, 중앙아시아 등 유라시아대륙 서부 각지에 70군데나 있었고 현재는 미국과 호주에도 있다. 하지만 알렉산드리아라는 이름의 도시가 최초로 세워진 곳은 동지중해에 접한 이집트의 나일강 하구다. 나일강 하구는 나일 삼각주로 불리는 녹지가 풍부한 땅으로 나일강 상류에서 토사가 실려 와 형성된 비옥한 토양을 잘 활용하여 이곳을 곡창지대로 만들었다. 고대 이집트는 기원전 3000년경부터 왕조가 등장하는데 카이로에서 남서쪽으로 약 20km 떨어진 기자에 그 유명한 3대 피라미드와 스핑크스상이 세워졌다. 이집트는 동지중해를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는 그리스와 오래전부터 관계를 맺어왔다. 그리스인들은 기원전 7세기에 현 알렉산드리아에서 남동쪽으로 약 75km 떨어진 나우크라티스에 식민도시를 세우고 무역활동의 거점으로 활용했다

     

    기원전 334, 마케도니아왕국의 알렉산드로스대왕은 그리스 도시국가들을 통솔하여 동방원정을 시작한다 2년 후 이집트를 침공한 그는 나일강 하구 파로스섬 인근의 작은 어촌이 항구가 될 만한 적임지라고 판단하고 자신의 이름을 딴 도시를 건설하도록 했다. 그리고 직접 말을 타고 달리며 중앙도로의 위치를 결정했다. 격자형의 시가지를 건설하고 전체 길이 1225m의 둑으로 파로스섬과 연결했다. 도심에는 그리스와 이집트의 신들을 모시는 신전도 건설했다. 알렉산드로스대왕은 원정길 도중에 알렉산드리아라는 이름의 도시를 곳곳에 건설했는데 정작 첫 번째 알렉산드리아의 완공을 보지 못한 채 기원전 323년에 사망했다. 그후 알렉산드로스대왕의 신하였던 프톨레마오스가 이집트에서 프롤레마이오스왕조를 열고 정비된 알렉산드리아를 수도로 삼았다. 그는 알렉산드리아에 대규모 무세이온(학술원)과 도서관을 건설했다. 도서관에서는 그리스와 이집트를 비롯해 메소포타미아아와 페르시아 등 각지로부터 철학. 시문, 역사, 천문학, 지리학 등 각종 책을 수집하고 필사하고 그리스어로 번역했다. 집 수집을 권한 이는 알렉산드로스대왕의 스승이었던 이리스토텔레스라고 한다

     

    무세이온(학술원)에는 기하학을 크게 발전시킨 수학자 유클리드, 부력의 원리를 발견한 물리학자 아르키메데스, 지동설의 선구자인 천문학자 아리스타르코스 등 뛰어난 인재들이 모여 그리스와 오리엔트의 종교, 학술, 미술이 융합한 헬레니즘 문화를 발전시켰다. 이는 훗날 로제국의 학술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알렉산드리아의 또 하나의 전설적인 건축물은 파로스섬의 대등대다. 이 건축물에는 약 140m 높이의 등댓불을 밝히기 위해 연료를 정상으로 끌어올리는 내부장치가 있었다고 한다. 이 대등대 역시 고대 그리스에서 꼽은 세계의 7대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지만 기원후 8세기와 13세기 발생한 대지진으로 붕괴되고 말았다. 1995년에 비로소 바닷속에서 유적의 일부가 발견됐고 이후 계속 조사가 진행 중이다. 알렉산드리아는 수백년에 걸쳐 학술 도시로 유명하고 최전성기 인구는 약 100만명에 이르렀으며 대부분 그리스에서 온 이주민이었다

     

    기원전 48년 프톨레마이오스왕조의 내분으로 결국 알렉산드리아 전쟁이 발발했다. 이 시기 카이사르가 이끌던 로마군이 알렉산드리아를 침공했을 때 한 차례 도서관이 파괴되었다. 카이사르의 협력을 얻어 즉위한 클레오파트라는 후에 로마와 대적하다가 기원전 31년 악티움해전에서 패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 이후 알렉산드리아를 포함한 이집트는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한편 이집트에서는 일찍부터 그리스도교가 퍼졌다. 알렉산드리아에서는 히브리어 성서가 그리스어로 번역되었는데 이것이 로마제국에서 그리스도교의 확산을 가속하는 한 요인이 되었다. 이집트는 로마제국에서 소비하는 곡물의 1/3을 생산하는 곡창지대였다. 알렉산드리아는 곡물 이외에는 면제품이나 유리제품, 파피루스의 생산지로도 유명했고 페르시아와 시리아 등 동방에서 실려 온 상품의 수출항으로 번성했다. 기원후 4세기 말 로마의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그리스도교를 로마제국의 국교로 제정했다. 그에 따라 그리스도교의 힘이 강해졌고 그리스와 이집트의 전통적인 다신교신앙이 탄압받았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이교도문화를 혐오하는 그리스도교의 공격을 받고 몰락했다

     

    1798년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오스만 제국이 통치하는 이집트를 침공했다. 이때 오스만 제국의 무함마드 알리는 프랑스군을 물리친 뒤 이집트 총독이 되었고 그는 새 왕조를 열었다. 그는 알렉산드로스대왕과 같은 마케도니아 출신이었다. 그는 무엇보다 이집트의 근대화를 이끌기 위해 유럽 각국과의 무역활동에 힘을 쏟았고 알렉산드리아는 상업항구로서 다시 활기를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오스만제국의 약체화와 영국과 프랑스 등 유럽 열강의 영향력이 점차 커졌다. 1882년 군인이자 민족운동자인 아라비 파샤가 이집트의 독립을 위해 반란을 일으키자 알렉산드리아는 전란에 휩싸였다. 하지만 반란은 실패로 돌아갔고 이집트는 영국이 통치하게 되었다. 1919년에 이집트는 독립을 이뤘지만 알렉산드리아는 계속해서 영국 지중해 함대의 거점으로 남아 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의 공습을 받았다. 전쟁이 끝난 후 영국이 해군기지를 철수했고 이집트 정부가 도시를 재건했다. 이에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부흥을 도모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마침내 2001년에 이집트 정부와 유네스코에 의해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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