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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난의 역사가 새겨진 성지인 예루살렘에 대해서
    아들을 위한 인문학/세계 도시 2023. 8. 1. 03:51

    예루살렘

    2017년 미국 트럼프 대통령은 이스라엘과의 우호관계를 강조하기 위해 텔아비브에 있던 미국대사관을 예루살렘으로 이전한다고 발표해서 파문을 일으켰다. 이스라엘의 헌법상 수도는 예루살렘이지만 국제사회는 예루살렘에 대한 통치권을 인정하지 않는 상황이다. 이스라엘이 19673차 중동전쟁에서 인접국 요르단에 속해 있던 예루살렘의 동부를 점령하여 수도로 선포했고 국제연합은 이를 부당한 점령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현재 각국 대사관이 대부분 텔아비브에 있는 이유다. 기원전으로 올라가면 예루살렘이 있는 팔레스타인 지역은 고대에 가나안이라고 불렸다. 이곳은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등 세 지역이 접한 요충지로, 지중해 연안의 다양한 민족이 한데 뒤섞여 공존하며 오래전부터 전란의 무대가 되었다. 가나안 땅에서는 기원전 7천년 전후부터 농경생활이 이루어졌고 이후 오랫동안 이곳은 이집트왕조의 지배하에 놓였다. 기원전 13세기경 이집트의 지배를 받던 히브리인이 가나안으로 이주해왔다. 히브리인은 타민족이 이스라엘 민족을 부를 때의 호칭이고 그들 스스로는 유대인이라 불렀다 구약성서에 따르면 유일신 야훼가 예언자 모세에게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갈 것을 명했다고 한다

     

    유대인은 여러 부족으로 갈라져 서로 다투는 한편 기원전 11세기 말에는 베냐민 지파 출신 사울이 다른 부족들의 합의와 예언자 사무엘의 인정을 받아 왕위에 오르고 이스라엘왕국을 수립했다. 사울에 이어 왕위에 오른 다윗은 돌을 던져 거인 골리앗을 쓰러뜨린 영웅이라고 전해진다. 다윗은 예루살렘에 수도를 건설하고 이스라엘 왕국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다. 예루살렘은 고대 히브리어로 평화가 있는 장소를 의미한다. 이어 왕위를 이어받은 솔로몬은 기원전 10세기 중반에 예루살렘의 도심을 북쪽으로 확장하여 성벽을 쌓고 동남쪽에 있는 모리아산에 야훼를 모시는 성전을 건설했다. 솔로몬의 사후에 이스라엘왕국에서는 여러 부족간의 항쟁이 재연되었다. 마침내 기원전 928년 남부의 유다족과 베냐민족이 유다왕국으로 독립했다. 예루살렘은 유다왕국의 수도가 되었고, 이스라엘왕국은 북쪽의 사마리아를 수도로 삼았다. 다윗의 자손이 신권정치를 이어가던 유다왕국은 기원전 586년에 신바빌로니아왕국에게 정복당하고 이때 성전과 도심이 파괴되고 왕족과 사제를 비롯한 많은 유대인이 바빌로니아로 끌려갔다. 바빌로니아 유수다 그리고 페르시아가 신바빌로니아를 멸망시키고 기원전 538년에 유대인의 귀환을 허락하고 이들은 새로운 성전을 건설했다 기원전 4세기에 마케도니아왕국의 알렉산드로스대왕이 페르시아를 침공했고 지배했고 그후 그의 신하가 창건한 왕조가 이집트와 가나안을 지배하면서 예루살렘에 그리스문화가 유입되었다.

     

    그리스도교 공인(313년)

    로마제국은 셀레우코스왕조를 멸망시키고 기원전 65년에 엘루살렘을 포함한 가나안 지방을 지배했다 기원전 40세기경 로마제국의 임명을 받아 유대인들의 왕이 된 헤롯왕은 예루살렘에 많은 건물을 지었다. 헤롯왕 시대에 건설된 헤롯 성전은 후에 로마군에 의해 파괴되어 지금은 통곡의 벽만 남아 있다. 같은 시대에 예루살렘 서부에 건설된 다윗의 탑으로 불리는 성채는 훗날 이슬람왕조시대에도 사용되었고 현재는 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기원후 30년경 유대교의 개혁을 주장하는 예수가 나타났고 그의 가르침은 유대교에서 분파하여 그리스도교라는 새로운 종교로 발전한다. 예수는 로마제국과 유대교에서 위험인물로 간주되었고 골고다 언덕에서 처형되었다. 헤롯왕 사후 로마제국과 유대인은 두 차례의 유대전쟁이 일어났다. 네로황제의 명령으로 로마군은 예루살렘을 침공해서 성전을 파괴했다. 135년에는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명에 따라 로마군이 가나안 지방을 점령했고 로마의 신 주피터를 기리는 신전이 세워졌다. 그 이후 유대인은 가나안 지방에서 추방되어 2천년 가까이 유럽과 서아시아를 비롯한 전 세계로 떠돌았다. 한편 로마제국에서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신자가 계속 늘어났다. 마침내 313년 콘스탄티누스 1세는 그리스도교를 공인했다

     

    바위돔 사원
    오스만제국

    7세기 아라비아반도의 무역상이던 예언자 무함마드가 이슬람교를 창시했다. 이슬람교는 그리스도교와 마찬가지로 구약성서의 세계관을 계승한다. 무함마드가 큰 바위 위에서 천사의 인도로 앞선 예언자와 신을 만나고 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691년 이슬람의 우마이야왕조 시대에 그 큰 바위를 뒤덮은 형태의 바위돔을 완공했고 이후 이곳은 이슬람교의 성지가 되었다. 이슬람왕조가 예루살렘을 지배하면서 많은 모스크를 세웠다. 이때에는 일정 연령 이상의 주민에게 일률적으로 부과하는 인두세만 내면 신앙의 자유를 보장받았다. 11세기에 들어 유럽에서는 성지탈환의 여론이 높아졌고 1099년 프랑스 제후들을 중심으로 한 1차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했다. 십자군은 예루살렘왕국을 건설하고 많은 교회와 수도원을 세웠다. 그후 13세기까지 유럽에서 십자군이 일곱 차례나 원정에 나섰다. 16세기에는 투르크계 오스만 제국이 예루살렘을 지배하였다. 그리고 19세기 말이 되자 프랑스와 러시아에서 반유대주의가 확대된 한편 유럽에 거주하는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유대국의 재건을 주장하는 시오니즘 운동이 활발히 일어났다. 1914년에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영국은 로스차일드가 등 유대계 자산가의 협력을 얻기 위해 팔레스타인에서의 유대국가 건설 지원을 약속했다. 그와 동시에 오스만제국을 무너뜨릴 목적으로 아랍인의 자치도 보장했다. 이렇듯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귀환은 현지 아랍인과의 합의가 이뤄지지 않은 채 진행되었다

     

    이스라엘 국가 탄생(1948년)
    예루살렘 4개 지구 분리

    1948년 이스라엘 국가가 탄생했다. 이에 이집트, 시리아 등 주변 아랍국들은 강력하게 반발했고 1차 중동전쟁이 터졌다. 당초 이스라엘에 속한 영역은 예루살렘의 서부뿐이었지만 19673차 중동전쟁에서 승리한 이스라엘은 동부도 자국령으로 편입하여 불가분의 수도라는 주장을 내세웠다. 원래 이스라엘 내에 살던 팔레스타인 이슬람인들은 동예루살렘을 수도로 하는 자치정부 건설을 주장하여 이스라엘 정부와 계속 대립하는 상황이다 예루살렘에서는 지금도 양측의 분쟁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한편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의 성지이기도 한 이곳으로 모여드는 순례자의 행렬도 끊이지 않는다. 현재 예루살렘의 동북부는 이슬람지구, 서북부는 그리스도교인지구, 동남부는 유대인지구, 서남부는 4세기에 거주하던 아르메니아인지구로 나뉘어 있다 한편 오스만 제국 시대에 건설된 성벽으로 둘러싸인 구시가지는 통째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성벽에는 북쪽에 다마스쿠스문, 동쪽에 성스테파노문 등 여덟 개의 문이 있는데 그중 남쪽의 시온문 근처에는 다윗의 묘가 있다 구시가지 바깥에는 시오니즘 운동이 부흥한 19세기부터 개발이 진행된 신시가지가 펼쳐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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