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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긴 미소 냉전시기가 가능한 것은 소련의 무한한 자원을 보유라고 하는데
    아들을 위한 인문학/정치 2023. 7. 4. 03:15

    < 공산주의 사상이 선진국에서 유행한 이유 >

    1차 세계대전부터 제 2차 세계대전에 걸쳐서 미국이 차차 세계의 경제 패권을 거머쥐고자 하던 때, 갑자기 거대한 대항 세력이 나타났다. 바로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 소련이다. 19-20세기에는 공산주의 사상이 전 세계를 석권했던 경제 사상이다. 19세기 독일에서 탄생한 공산주의 사상은 전 세계의 지식인들에게 널리 퍼졌다. 당시는 자본주의의 부작용이라고 할 수 있는 빈부 격차가 사회문제로 대두된 시기였다. 산업혁명을 통해 대규모 공장이 출현하여 거액의 부를 축적하는 자본가가 생겨나는 한편,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낮은 임금을 받으며 가혹한 노동을 강요당하고 있었다. 당시 서구 국가들은 노동법이 정비 되어 있지 않아 노동조건은 고용주와 노동자 사이에서 자유로이 결정되곤 했다. 이 같은 자본주의의 모순을 단번에 해결할 사회 시스템으로 공산주의를 부르짖게 되었던 것이다. 공산주의는 빈부 격차도 불경기도 실업도 없이 모두가 한결같이 번영을 누릴 수 있다는 이상향 같은 사상이었다.

     

    1차 세계대전 중이던 1917117일 러시아혁명이 불러일으킨 혼란 속에서 공산주의자 무리가 무장봉기하여 권력을 장악했다. 그리고는 공산당 독재에 의한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 소련이 탄생한다. 공산주의라는 사회 체제는 피폐한 상태의 국가가 부흥하는 데는 상당한 효력을 발휘했던 것 같다. 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혁명 떄문에 대혼란에 빠져 있었던 당시 소련은 공산주의 정권의 지도에 따라 단기간에 국가를 재건하는데 성공했다. 1928년에는 경제발전을 위한 5개년 계획을 시행했다. 그 내용은 농지를 국유화하고 국민에게 제공하는 것, 중공업을 산업의 중심으로 발전하여 공업 생산고는 250%증가 했고 중공업은 330% 농업생산은 150%증가했다. 마침 이때 미국과 서구는 경제대공황으로 심각한 실업난을 겪었다.

     

    <공산주의 확산에 대한 구미의 경제심 >

    대부분 국가는 소련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입장이었다. 공산주의 사상이 널리 퍼져 자국으로까지 영향을 미칠까 봐 경계심을 가졌던 것이다. 게다가 당시의 공산주의 사상은 무력혁명을 표방했고 선거를 통해 정권을 장악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 당시 다른 국가 정권들이 공산주의 사상을 경계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공산주의에 대한 서구 국가들의 경계심은 나치 정권이 탄생하는 배경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1930년대 초 독일에서는 공산당과 나치당이 대대적으로 약진했다. 19331월 독일 정재계는 공산당이 정권을 쥐는 것보다는 낫다는 이유로 히틀러를 수상에 임명해 나치 정권을 탄생시켰다. 1936년 일본과 나치 독일은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에 대항하고 공동으로 방어한다는 내용의 방공협정을 체결했다. 이는 코민테른이 일본과 독일을 비난했던 데 따른 대항 조치이기도 했다. 그리고 당시 독일과 일본은 국제연맹을 탈퇴하여 국제적으로 고립된 차에 세계적으로 적대시하던 공산주의를 막는다는 명분이라며 협정을 맺어도 다른나라들 또한 용인하리라 본 것이다.

     

    < 제 2차 세계대전을 둘러싼 눈치 싸움 >

    2차 세계대전에는 영국과 미국, 프랑스 등이 중심이었던 연합국 진영에 소련이 합류한다. 소련은 추축국 진영에 가세할 가능성도 다분히 있었다. 2차 세계대전은 독일의 폴란드 침공을 발단으로 한다. 폴란드를 지켜야 한다는 명목으로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포고를 한 것이다. 그런데 이때 소련도 폴란드를 침공했다. 독일과 소련은 비밀조약을 체결하여 폴란드를 동서로 분할하려 했다. 폴란드를 침공한 직후 소련은 핀란드에 대해서도 강경한 요구를 내놓았다 카렐리야 지협의 국경선을 북쪽으로 후퇴시키고 핀란드 남서부에 있는 한코반도를 기지로서 조차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핀란드는 거부했고 1939년 국경부근에서 발생한 충돌을 계기로 전쟁 상태에 돌입했다 핀란드는 국제연맹에 억울함을 호소하고 단지 소련을 제명하기만 하고 군사적 제재를 가하지는 않았다. 이는 영국과 프랑스가 소련에까지 선전포고를 했었다면 완벽히 패배했을 것이다. 당시 그들에게는 소련과 맞서 싸울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편 독일은 영국과 교전상태인 채로 19416월 소련도 침공했다. 미국과 영국 프랑스는 처음부터 소련을 지원하지 않았다. 독소전쟁이 발발한 후 24시간 후에 미국은 소련의 공산주의는 결코 용납할 수 없으나 히틀러가 승리하는 쪽이 더 위험하다는 이유로 소련을 지원할 것을 표명했다

     

    미국은 소련에 113억 달러어치의 무기를 거의 무상으로 제공했다. 군용기 약 1.5만기 전차 약 7천량, 군용자동차 약 40만대의 이르는 막대한 양이었다. 독일이 모스크바까지 쳐들어 왔어도 소련이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의 지원 덕분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미국은 무기를 제공하는 것 이상의 지원을 좀처럼 하지 않았다. 여기에는 미국의 교활한 계산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 시기 민주당의 상원의원 해리 트루먼은 독일 승리할 것 같으면 소련을 지원하고 소련이 승리할 것 같으면 독일을 지원하면 된다 그들을 싸우게 만들어 둘 다 피폐하게 만들면 그만이다. 다만 히틀러가 최후에 승리하는 경우만큼은 피해야 할 것이다라고 한 바 있다.이것이 당시 미국의 속내로 소련이 됐던 독일이 됐던 전쟁을 통해 국력을 약화시키고자 했다. 미국의 계산은 빗나가고 미국의 유럽 상륙이 늦어진 탓에 소련은 자력으로 나치 독일을 물리치고 독일 본국까지 공격해 들어갔다. 진격하는 와중에 동유럽 지역도 소련의 점령 지역으로 넘어가 소련을 중심으로 공산권으로 편입되었다

     

    < 냉전 장기화는 소련의 풍부한 자원 때문이다 >

    당시 소련은 미국의 지원을 기대하고 있었다. 전쟁 중에는 113억달러나 되는 무기를 지원했으니 전쟁이 끝난 후에도 상당한 지원을 기대했다 그래서 마샬플랜에도 참가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19477월 마샬플랜을 수용하기 위해 영국, 프랑스, 소련의 삼자회의가 파리에서 개최되었다. 소련 대표는 동유럽 공산주의 국가들에도 마샬플랜에 참가할 준비를 진행하도록 지시한 상태였고 폴란드와 체코 등은 실제로 참가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독일 점령정책을 둘러싼 대립으로 소련 외무장관이 회의 도중에 귀국해버렸다. 그리고 소련은 동유럽 국가들을 대상으로 미국의 마샬플랜을 수용하지 말도록 압력을 행사하고 그 대신 경제상호원조회의(코메콘)을 결성했다. 소련과 동유럽 경제를 블록화하여 1947년에 3.8억달러에서 1952년에는 25억달러를 이르렀다 한편 미국이 먀샬플랜으로 유럽을 원조하지 않으면 회생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소련은 막대한 자원을 보유하므로 미국의 정책에 반대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소련은 석유, 천연가스, 석탄 같은 에너지자원, 철광석, , , 니켈, 수은, 알루미늄 같은 광물자원 등 산업에 필요한 자원의 대부분이 소련 내에서 산출되고 있었다 냉전시기에는 석유 산출량으로 사우디를 제치고 세계 1위를 차지한 적도 있다 어패류 같은 수산자원도 풍부했으며 삼림이 국토의 절반을 차지하기 때문에 목재도 넉넉했다. 소련은 동유럽에 에너지와 자원을 공급하고 동유럽 국가는 농산물을 제공하므로 미국의 경제제재를 받아도 살아갈 수 있어 긴 냉전 상태에 접어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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