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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페인-2)지리적 방해가 아직도 끝나지 않는 스페인에 대해 알아보면
    아들을 위한 인문학/정치 2023. 4. 25. 03:53

    1차 세계대전 후 불고 있는 파시즘과 공산주의 물결은 스페인에 영향을 미쳤다. 1923년 스페인 내에서 군사 쿠데타가 발발했으나 6년후인 1931년 선거로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그들은 군대의 고위 장교들을 축출하고 교회의 특권을 배격했으며 광대한 사유지들을 국유화하고 산업 노동자 계급이 상승했다 그러나 1년도 채 되지 않아 또 다른 정변이 시도된다. 이 쿠테타는 실패로 돌아가지만 여기서 야기된 혼란으로 스페인은 1933년 다시 선거를 치른다. 이 선거에서 우파정권은 카탈루냐에게 더 많은 자유를 부여한 조치를 뒤집었다. 1936년 일련의 파업 사태와 인정사정없는 탄압, 그리고 만신창이가 난 경제 상황 속에서 다시 선거가 치러진다. 이번에는 통합 인민전선의 형태로 참여한 좌파가 다시 권력을 잡았지만 서로 다른 파벌들이 극단을 향해 치닫는 가운데 스페인은 결국 내전에 빠진다.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반란군에게 훈련된 군대를 지원해줌에 따라 소련이 인민전선의 정부군측에게 무력 지원을 시도했음에도 프랑코의 반군 세력이 저항세력을 제압하여 1938년에 공화파는 극도로 피폐해 갔다. 난민이 3백만명이 생기고 1939년 바르셀로나를 떠난 50만명의 시민과 병사들은 프랑스 국경쪽으로 떠났다. 결국 19392월말에 프랑코 군대가 바르셀로나로 들어와 영국와 프랑스는 프랑코 새 정부를 인정했다. 3월에는 20만명의 군인들이 마드리드에 무혈입성했다

     

    지도자로 알려진 프랑코 장군을 향한 개인 숭배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공화주의자들이 입법했던 자유주의 성향의 법률들을 폐기하고 여자가 대학에서 가르치는 것을 금지하는 등 여자를 억압하는 정책을 폈고 교회에서는 프랑코 정부를 신의 섭리로 추앙할 뿐 아니라 국가를 통합된 단일 실체로 선전했다 이는 바스크나 카탈루냐의 지역의 정체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심지어 카탈루냐의 민속춤인 사르다나도 금지했다. 한편 프랑코 정부는 1975년까지 스페인을 통치했다. 프랑코는 자급경제로 국가의 가격 통제와 외국과의 무역 제한 조치를 했다. 2차 대전후 서구 열강은 국제질서 개편에서 동부 전선에서 나치와 함께 협력하도록 병력 5만명을 보낸 프랑코 정부를 무시하고 유엔이나 마셜플랜 나토까지도 무시되었다 그러나 소련의 침략에 대비해 1953년 마드리드 조약으로 스페인은 향후 20년간 20억달러의 군사 및 경제 원조를 받는 대신 미군에게 육군과 공군, 해군기지들을 허용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므로 스페인은 무역구제가 다소 풀리고 1960년 스페인은 경기가 살아나서 세탁기와 텔레비전이 들어오게 되었다 그후 1969년 프랑코 정부는 자신의 뒤를 이를 국가의 수장으로 국왕으로 후안 카를로스 왕자를 지명하는 법안에 서명했다

     

    카를로스 신임 국왕은 기존 국정 기조를 뒤집었다. 스페인은 유럽의 일부이다 그리고 민주주의가 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줄타기를 감수하고서라도 기존의 정치 체제를 해체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카탈루냐와 갈리시아를 방문해서 그들의 독자성을 인정하는 연설을 했다. 정당들이 다시 살아났고 언론에 물렸던 족쇄도 풀렸다. 당연히 개혁을 방해하려는 구체제 옹호자들의 움직임도 있었다. 1976년에는 국민투표로 입헌군주제가 수립되었다. 1977년 총선이 치러져 중도 우파 정당이 다수당이 되고 사민당과 공산당이 그 뒤를 이었다 프랑코 주의자들이 창당한 당은 뒤로 밀려났다 1981년에는 테헤로 중령이 의사당에 난입하는 쿠테타를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1982년에 스페인은 나토에 가입했고 1986년에 EU 회원국이 되었으며 1999년에 유로화를 채택했다. 국토를 19개의 행정구역으로 나눈 신헌법은 이나라의 역사적 지리적 차이를 인정했다. 그러나 아직도 독립을 향한 지역적 긴장감이 남아 있다. 따라서 스페인 사람들은 루마니아 다음으로 자기네 정부를 못 믿는다고 한다

     

    최근 들어 바스크 지역에서 마드리드 정부의 통치에 반발하는 가장 큰 폭력사태가 발생했다. 이러한 민족의식은 늘 일정한 자치권이나 완전한 분리를 요구하는 쪽으로 향해 왔다. 그들의 목표는 스페인과 프랑스 양쪽에 걸쳐 있는 바스크 국가를 세우는 것이었다. 1968년에는 한 경관을 살해를 필두로 법관 등 일련의 충격 사건과 폭탄 테러를 저질렀다. 그로 인해 850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또한 1989년 바스크 단체는 바르셀로나의 한 슈퍼마켓에서 폭탄테러로 21명이 사망했다 그러다가 2011년 폭력의 완전한 중단에 합의했고 2018년에는 바스크 단체인 ETA의 해체를 선언했다. 또한 카탈루냐는 이보다 더한 전면적 독립을 요구했다. 이지역은 가장 부유한 지역으로 벨기에의 면적과 비슷하고 750만명이 인구로 카탈루냐어를 쓴다. 스페인 북동쪽 끝단에 삼각형 모양으로 위치해 있는 이 지역의 형상으로 동쪽으로는 지중해가 북쪽으로는 피레네 산맥이 만들어 주고 있다. 서쪽에는 에브로강이 아라곤과 경계를 마주하고 있고 남쪽으로는 발렌시아와 맞닿아 있다. 이 지역은 방직업으로 부를 쌓아왔으나 현재는 중공업과 관광업 등으로 경제를 다변화시켜 가고 있다. 카탈루냐는 스페인 총인구의 16%이고 국민총생산의 20%와 수출의 1/4을 담당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2008년 경제 위기시 분리독립을 내세우며 카탈루냐의 세금을 불공정하게 쓴다는 불만을 내세웠다. 그러다 2017년 카탈루냐 의회는 독립을 승인했으나 스페인 대법원은 인정하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마드리드 정부는 카탈루냐 내각은 불신임하고 자치를 연기하는 한편 직접적인 통제권을 행사했다. 결국 카탈루냐 지도자들 일부는 수감되었고 일부는 해외로 도피했다

     

    만약 독립한 카탈루냐가 EU로부터 배척당한다면 중국과 러시아가 필시 카탈류냐와 새로운 우호관계를 맺고 영향력을 행사하러 나설 것이다. 만약 카탈루냐가 하나의 독립된 국가가 된다면 스페인은 카탈루냐의 EU가입에 거부권을 행사할 것이며 그러면 중국의 전략이 먹혀들 여지가 생긴다. EU와 회원국의 지도자들에게도 카탈루냐 문제를 피하고 싶은 문제일 것이고 이 지역이 독립되면 코르시카, 스코틀랜드, 플랑드르, 시칠리아, 바이에른 등 유럽 각국의 독립운동을 연쇄적으로 부추길 위험이 있다. 만약 EU가 카탈루냐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대안으로 유럽자유무역연합( EFTA )이 뜰 수 있다. 만약에 영국이 여기에 가입하게 되면 그세력은 강력한 기구로 성장할 수 있다 여기에는 스위스, 노르웨이, 아이슬란드, 리히텐슈타인으로 구성된 연합체이다. 카탈루냐 문제에 있어 영국은 곤란한 처지에 있다. 포클랜드 제도와 지브롤터에 대한 입장 때문이라도 카탈루냐의 자결권을 인정해야 하면서도 동시에 스코틀랜드 독립에 반대하는 입장에서는 카탈루냐의 독립을 인정할 수 없어 어쩡적한 입장이다

     

    18세기 초반에 영국한테 지브롤터를 빼앗긴 스페인은 줄곧 그곳을 돌려받고 싶어한다 스페인은 대서양으로 드나들 수 있는 곳이다. 한편 모로코와 지브롤터 사이의 지역은 사람은 물론이고 마약 밀매의 교차로이기도 하다. 많은 사람과 마약이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스페인을 통해 유럽으로 들어간다. 이곳이 아프리카와 유럽 국경인 것을 알고 있는 수천명의 이주민들과 난민들이 이 담장을 넘어온다 한편 스페인과 모로코는 사헬이 처한 상황을 잘 알고 있고 만약 사헬 지역 국가들이 분열될 경우 모로코도 불안해져서 스페인 본토까지 연쇄적으로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스페인은 말리를 비롯한 여러 사헬 지역까지 정부군을 훈련시키는 일에 관여하고 있다. 스페인은 2008년 경제 위기에서 살아남아 유럽 경제 강국 중 하나라는 지위를 되찾았다. 그리고 석유나 천연가스가 풍족하지 않지만 수력발전과 태양광이 풍부하여 재생에너지를 선도하고 있다. 그렇지만 스페인의 큰 문제는 지리에 근거한 지역성에 의해 분열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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