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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페인 -1) 지리의 방해가 아직도 끝나지 않은 스페인에 대해서 알아보면
    아들을 위한 인문학/정치 2023. 4. 11. 03:17

    좁고 먼지가 나는 산악지대의 구불구불한 길을 운전하다가 모퉁이를 도는 순간 거대한 암석 위에 떡하니 서 있는 난공불락의 웅장한 요새와 마주한다. 이처럼 스페인은 한마디로 요새다. 지중해와 대서양에서에서 시작하는 좁은 해안 평야는 이내 거대한 산맥과 맞닥뜨린다. 그리고 중부지역 전체는 높은 고지대와 깊은 골짜기들로 이뤄진 고원지대다. 스페인 중부 대규모 평원지대 한복판에 마드리드가 있다. 16세기에 마드리드가 수도로 선택된 것도 스페인의 한복판에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이것은 마드리드와 잠재적인 경쟁 세력 간의 거리를 좁히면서 나라 전체에 보다 더 중앙 집권적인 통제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런데도 이 나라의 산악지형과 면적(영국의 2배 이상)은 늘 교역과 강력한 정치적 통치력을 행사하는데 걸림돌이 되었으며 각 지역마다 자신들만의 독특한 문화적 및 언어적 정체성을 그대로 간직할 수 있게 한 요인이 되었다. 현대에서도 마드리드에서 벗어나기 위해 폭력을 행사하려는 최북단의 바스크 극단주의자드링 저지르는 테러를 수반한 분리 독립운동부터 동일한 목표를 갖고 있는 카탈루냐의 정치 운동에 이르기까지 여러 형태로 남아 있다

     

    스페인은 대다수 서유럽 국가들에 비해 인구밀도가 낮다. 마드리드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대도시는 해안선을 따라 형성돼 있다. 바르셀로나, 발렌시아, 빌바오가 그 좋은 예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내륙의 시골에서 해안의 도시로 향하는 이주가 가속화됐기 때문이다. 현재 인구는 4700만명을 기록하고 있다. 지중해에는 모두 151개 섬으로 이루어진 스페인령의 발레아레스 제도가 있다. 이 제도는 유럽에서 가장 넓은 군도를 이루고 있지만 정작 사람이 거주하는 섬은 마요르카 등 5곳뿐이다. 한편 스페인이 최정성기를 구가하던 시대에도 이 나라의 지리는 부의 창출과 정치적 통합을 방해하고 있었다. 특히 프랑스와 스페인의 국경을 이루는 피레네 산맥은 교역에서 원활한 흐름을 방해하는 걸림돌이 되었다. 스페인은 산악지대에 가까이 붙은 좁은 평야에서도 올리브, 오렌지, 와인의 산지로 유명하다. 또한 스페인은 큰강이 없고 대다수 강은 길이가 짧고 수량이 적아서 가뭄으로 작물이 말라 죽는 경우가 많다. 스페인은 다섯 개의 주요 강이 있는데 내륙으로 운항하는 강인 과달키비르강은 세비야를 지나며 해양을 운항하는 선박들이 오갈 수 있는 내륙항구가 있다. 8세기에 스페인에 진출한 무어인(아랍계 이술람교도)들이 칼리프 왕국을 세운 후 8백년 동안 머무르면서 북쪽의 코르도바와 함께 세비야를 권력의 거점으로 삼은 이유로 알 수 있을 것이다

     

    투르전투

    유럽의 남서쪽이라는 스페인의 위치는 고대부터 카르타고와 로마 즉 북아프리카와 유럽 양쪽에서 사람들을 불러들였다. 스페인은 6백년 동안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로마 시민들을 위해서 이곳에 소수의 정착지만 건설했는데도 로마는 이 나라의 건축, 종교, 언어 등에 두고두고 남을 영향을 끼쳤다. 그렇게 로마인들은 이베리아 반도 전체를 아우르는 문화가 생성되는데 큰 기초를 닦았다. 정작 로마인의 언어인 라틴어는 쇠락했지만 라틴어로부터 카탈루냐어, 포르투갈어 등이 파생되기도 했다. 한편 8세기에 무슬림들이 이베리아 반도 전체를 장악하게 되면서 알 안달루스라 이름이 붙었다. 그들은 피레네 북부를 지속적으로 공략했으나 투르 전투에서 프랑크 왕국이 승리하여 무슬림들은 그리스도세력에 의해 더 진출하지 못하게 되었다.투르 전투 이후 무슬림들은 점점 밀려나기 시작하더니 756년부터 1031년까지 이베리아 반도의 2/3만을 차지한 채 안달루시아 우마야드 왕국을 세우고 머물렀다. 그리고 1250년이 되어서야 이베리아 반도 대부분이 그리스도교 세력 휘하로 들어갔다.

     

    카스티야 왕국의 이사벨라 공주가 아라곤 왕국의 페르디난도 왕자와 결혼을 한다. 아라곤과 카스티야 왕관이 하나로 합쳐진 것이다. 스페인 동북부와 서부가 하나로 통합됐다는 의미를 갖는다. 사실 이는 경제적으로는 큰 효과가 없는 정치에만 제한된 연합이지만 스페인 탄생의 획기적 사건이 되었다. 1482년 카톨릭 군주로 알려진 이 부부는 향후 10년 동안 이어질 그라나다에 대한 공격을 개시한다. 1492년 마침내 그라나다가 항복을 선언하고 카스티야에 합병한다. 이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8백년간 걸친 무슬림 통치가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이들 부부는 강력한 종교정책으로 개종이냐 추방이냐에 대해 무슬림과 유대인에게 양자택일의 길을 강요했다. 이때 4만명의 유대인이 이 지역에서 떠났다고 추정하고 이 정책은 1968년에야 폐지되었다. 무어인은 강제로 수만명이 추방되면서 인구의 1/3을 잃은 발렌시아 왕국은 한세대 동안 농업이 황폐화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스페인 군주들은 가능한 많은 사람을 개종시킬 종교적 책무가 있다고 믿었다. 비단 스페인 내부뿐 아니라 그 바깥까지도 였는데 이에 40세 콜롬버스가 인도로 가는 빠른 해상항로를 개척하려도 서인도제도의 섬을 발견하게 되었다

     

    스페인은 대략 1500년부터 1681년 이르는 황금기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즈음 남아메리카의 금광과 은광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막대한 양의 부가 국민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켜 주었고 덕분에 군사력도 확충되었고 건축, 문학, 회화 분야에서도 걸작들이 나왔다. 하지만 스페인의 각 지역들은 여전히 상이한 정체성을 유지한 채 각자의 방식대로 정치 및 경제를 독자적으로 발전시켜 가고 있었다. 이 나라의 지리가 잉태한 이 같은 국내 문제들 발전을 가로막는 균열이 스페인으로 들어오는 금은보화의 물결로도 해결할 수 없었다. 스페인은 국부의 상당 부분을 유럽내 분쟁에 쓰고 있었다. 1600년 중반에 들어서서 스페인은 해상 항로 지배권을 잃어가고 있었다. 특히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키우는 바다의 개라고 불리는 해적인 월터 롤리와 드레이크는 약탈과 살인으로 스페인을 괴롭혔다 한편 스페인의 펠리페 2세는 영국해협에서 전함 130척을 투입해서 영국 함대를 박살내려는 의도는 폭풍우로 인해 무산되고 스페인의 무적함대는 영국함대에 무너져 패권경쟁에서 스페인은 물러나게 되었다

     

    1640년에 스페인은 프랑스에 대한 군사작전을 카탈루냐에서 개시했다.중앙정부를 열렬히 지지하지 않은 카탈루냐는 국경을 넘어온 프랑스 측에 합류했다. 그둘은 힘을 합쳐 스페인군을 무찔렀다. 그런데 1648년에 프랑스군대가 철수하고 1652년 심한 기근이 들자 마드리드는 카탈루냐에 식량공급을 끊으면서 다시금 지배권을 획득했다. 1700년대에 접어들면서 숱한 전쟁을 치르면서 유럽 내에서도 많은 영토를 잃어가고 있는 상태였다. 1807년에 3만명의 프랑스 군대가 국경을 넘어 이베리아 반도로 진격해 들어오면서 이른바 독립전쟁이 발발한다. 게릴라는 이 전쟁에서 나온 말로 전쟁을 의미하는 게라에서 파생된 것이다. 프랑스군에게 큰 피해를 입힌 스페인의 비정규군 무리를 지칭하면서 쓰이기 시작했다. 19세기 후반 들어 영국, 프랑스, 독일이 눈부신 발전을 하지만 스페인은 산업혁명을 쫓아가려 했으나 단결력에서 미치지 못했다. 국론은 분열되고 국가보다는 자신이 속한 지역 더 충성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 가운데 1898년 푸에르토리코, 쿠바, 필리핀까지 잃음으로써 옛 제국의 잔재마저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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