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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리스 2) 유럽의 난민, 사이프러스 가스전과 러시아 진출 등 열강의 각축인 그리스에 대해서
    아들을 위한 인문학/정치 2023. 4. 4. 03:32

     

    그리스는 1920-1930년대는 지속되는 분열과 불안정 그리고 파시즘과 손발을 맞추는 군사 통치의 시대였다. 그리스는 독재자 이온안니스 메탁사스 장군의 지휘 아래 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다. 애당초 그는 그리스가 중립을 지키는 걸 원했다. 하지만 두 차례에 걸친 이탈리아 침공에서 고배를 마신 뒤 그리스는 독일에 항복했고 이후 독일과 이탈리아, 불가리아 군대에 의한 가혹한 점령기를 보내게 된다. 그리스 지리 덕분에 점령국은 내륙 전체를 지배하진 못했고 그리는 결사적으로 항전할 수 있었다. 그들은 산악지형을 십분 활용해서 지속적으로 게릴라전을 펼쳤다. 이 기간에 행해진 적군의 식량 징발로 수만명의 그리스인들이 굶어 죽었고 7만명이 처형당했다. 194410월 독일군이 철수하자 영국군이 아테네로 입성했다. 그해 12월 그리스는 왕당파와 반왕당파로 국론이 갈라져 내전이 벌어졌다 그리고 1946년 왕당파가 다수당이 되자 선거에 불참했던 공산주의자들은 그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1947년 영국은 더 이상 그리스를 방어하는 책무를 수행하기 어려워 미국에게 그 역할을 넘겼다. 그러자 미국은 그리스 군대를 지원하기 시작했고 공산주의의 본거지인 산악지대를 소탕했다. 1949년 그리스 반군 대다수가 알바니아로 퇴각하면서 내전은 종식됐다

     

    19675월 선거는 군부의 영향력을 대폭 축소시키겠다는 공약을 내건 중도좌파의 승리가 점쳐졌다. 그에 앞선 4월에 쿠데타가 고위장성들이 아닌 하급 장교들이 그 배후로 일어났다. 그들은 주요 정치인들과 군의 최고사령관을 체포한 것을 필두로 1만명을 색출했다. 그리스에 민주주의가 다시 찾아온는 것은 1974년이다. 그리고 1981년 그리스는 나중에 EU가 되는 EEC에 가입했다. 금세기 초반 10년동안 탄탄한 경제 성장과 2004년 성공적인 올림픽 유치로 그리스 경제의 구조적인 균열을 미봉책으로 가려진 채였다. 하지만 2008년과 2009년의 재정위기에도 정부는 잇달아 차관을 들여와 공공부문이 GDP40%를 육박하는 경제가 키웠다. 또 유로화를 도입하는 과정에 그리스 정부가 회계 장부를 조작했는데도 유로존 회원국들은 이를 눈감아 주었다. 격렬한 시위와 소요 등으로 사회적 고통을 겪는 와중에 그리스 경제는 붕괴를 향해 가고 있었다. 그러자 IMF가 차관을 허용하는 대신 극도로 긴축정책을 요구했다. 또한 그리스는 발칸 루트를 통해 부자 나라들로 가려는 시리아 등 이주민과 난민 행렬에 기착지이지만 EU는 물론 다른 회원국들의 지원이 없어서 불만이 많은 상태이기도 했다.

     

    그리스와 터키 간에 적대감을 가중시키는 여러 분쟁의 뿌리는 고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것은 트로이 공성전이다. 그리스가 목마로 도박을 걸었던 3천년 전에 시작됐다. 그리고 역사적 근거가 있는 두나라간 전투는 1071년 동터키 지방에서 비잔티움의 그리스인들이 셀주크 투르크와 대결했던 만지케르트 전투다. 여기서 그리스인들은 패하고 비잔티움의 콘스탄티노플을 얻었다. 한편 그리스는 그들의 국토방위는 본토방위와 에게해의 지배권에 집중돼 있다. 1981년에는 GDP5.7%를 국방예산으로 나토 회원국 중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었다가 차츰 나추어 2018년에는 2.4%로 줄였다. 그리스인 1050만명의 인구의 1/3은 수도권에 몰려 있고 섬들에는 수십만명이 거주하고 있다. 그리스 정부는 대대로 터키를 위협 세력으로 간주해 왔다. 따라서 현대적 해군과 대규모 육군 게다가 유럽에서 최고로 치는 전투기 조정사들이 포함한 첨단 공군도 거느려야 한다. 에게해 상공에서 터키 조종사들과 모의 공중전을 자주 벌이는 만큼 이러한 국방력은 필수적이다.

     

    지상에서는 인구 밀집 지역을 방어하고 농경지대와 유럽으로 들어가는 길목을 지키기 위해 북마케도니아로 이어지는 바르다르강을 가능한 한 수성하는 것이 우선사항이 된다. 그리스는 자국에 있는 마케도니아 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을 할까봐 이웃에 있는 동명의 마케도니아공화국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2018년에 양측이 마케도니아라는 국명 대신 북마케도니아공화국이라는 명칭에 합의를 보았는데 그리스 내에서는 마케도니아의 도용이라고 민족주의자들 사이에 반발이 심했다. 한편 그리스의 방어력은 에게해 특히 로도스와 크레타섬 그리고 좀 더 동쪽인 지중해의 섬나라 사이 프러스로 집중된다 그리스가 여전히 수호자로 자처하고 있는 사이프러스는 전략적 지정학적 동부 지중해의 요충으로 최근에는 천연 가스전까지 발견되고 있다. 오스만 제국의 통치를 하다가 1878년 영국은 이섬을 행정적으로 책임지다가 1914년 통합해 버렸다. 냉전시기에 사이프러스는 지중해를 감시했으며 저 멀리 중앙아시아에서 실시한 소련의 핵실험도 모니터할 수 있었다 현재도 영국은 이곳에 비행기지를 두고 수천명의 자국군을 주둔하고 있다

     

    1960년에 이룬 사이프러스의 독립은 다수의 그리스계 사이프러스 주민과 소수의 터키계 사이프러스 주민 간에 정파적인 폭력사태를 불러일으켰다. 사태가 벌어지자 유엔은 양측 사이에 그린 라인을 치고 평화 유지군을 파병해서 감시했다. 1970년에는 사이프러스 마키리오스 대통령은 모스크바에 가까워지려고 하자 미국은 그리스의 군사정권을 지지하며 1974년 그리스와 사이프러스를 합병한다는 계획으로 쿠데타를 사주해서 마카리오스 정권을 전복시켰다. 하지만 이것은 역으로 사이프러스에 거주하는 터키계 주민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터키의 사이프러스 침공을 불러왔다. 1983년 사이프러스의 북부 지역이 북사이프러스터키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독립을 선언하고 나섰다. 따라서 사이프러스는 현재 남과 북으로 분단되어 있는 상황이다. 유엔은 터키의 점령하에 있는 이곳을 사이프러스공화국의 영토로 인정하고 북사이프러스터키공화국은 인정하지 않고 있다. 한편 동부 지중해에서 대규모 가스전들이 발견되면서 그리스와 터키는 갈등이 고조되었고 러시아는 사태를 주시하며 가스 공급의 독보적 위치를 상실할까봐 전전긍긍하였다.

     

    2019년 그리스는 이집트,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사이프러스, 요르단, 이탈리아와 함께 키이로에 본부를둔 동지중해가스포럼을 설립하는데 힘을 보탰다. 이 기구는 에너지 수급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면서도 해군 합동 작전과 훈련을 같이 하여 안보적인 요소까지 포함하고 있다. 2020년 터키의 소형 구축함들이 사이프러스 가스전에 근접해 오자 프랑스는 항공모함인 샤를 드골호를 급파해서 나토 동맹국인 터키 해군의 뒤를 미행했다 심지어 프랑스는 처음으로 아르메니아 대학살을 추모하는 날을 국경일로 지정하자 양국 관계는 얼어붙었다. 한편 그리스는 자신들이 터키를 대체해 에게해에서 나토에서 미국의 파트너로 나토의 핵심멤버로 위치하기를 바라고 있다. 이런 배경에서 미군의 해군기지를 유치했다. 이로 러시아가 남쪽에서 발칸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할 세력 기반을 갖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따라서 사이프러스가 그 만큼 중요한 지정학적 위치에 있다는 것이다. 또한 미국은 시리아 국경 가까이 있는 터키의 인시르리크 공군기지를 계속 사용하는 것이다. 그리스는 유럽의 난민 위기의 최전선이라는 문제와 사이프러스 가스전과 러시아 해군이 흑해에서 탈출해야 할 때 그리스는 2차 방어진지가 되는 등 국제적 복잡한 문제가 얽혀 있고 국내도 지리상의 분열도 여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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