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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근대를 품은 분지의 도시 대구를 찾아가 보면
    아들을 위한 인문학/국내여행 2022. 10. 15. 02:36

    동성로 동판

    대구 시내를 둘러싼 이름은 동성로, 남성로, 서성로, 북성로이다. 근대골목투어도 4성로를 가로지르고 있다. 현재 도로가 놓인 자리는 대구읍성이 서 있었던 곳이다. 대구읍성은 1590년에 토성으로 조성되었으나 임진왜란을 겪는 와중에 파괴되었으나 1736년에 다시 석성으로 재건되었다. 그러나 1906년 친일파였던 경북관찰사 서리 박중양이 정부의 허락도 없이 일본인의 요구대로 읍성을 헐어버렸다. 그 자리에 신작로를 통해 근대의 대구가 성장했다. 동성로를 걷다 보면 바닥에 현재 동성이 있었던 자리임을 나타내는 동판이 있고 북성로와 남성로에도 있다. 동성로는 대구 최고의 번화가에 걸맞게 여러 극장과 귀금속 쇼핑 지구, 대구백화점, 식당이 즐비하다. 그리고 대구역 앞에서 동성로와 북성로가 만난다. 북성로에는 공구 골목이 형성되었다

     

    중구 일대에는 집적지로 서문시장 주변의 타월거리와 오토바이 골목 등이 있다. 북성로에는 공구상점 이외에 작은 공장도 많았다. 90년대까지 큰 공업지구로 형성되었다 또한 이곳에 탄생한 음식이 북성로 돼지갈비와 우동이다. 신작로가 생기기 전 대구읍성의 중심지는 경상감영일대였다. 조선 초 경주에 있었던 것이 상주, 안동을 거쳐 1601년 선조에 최종적으로 대구로 이전해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최근에는 시민 쉼터인 공원으로 조성되었다. 경상감영 공원 옆에는 대구근대역사관이 있다. 이는 1932년 조선식산은행 대구지점으로 건립되었으며 광복이후 한국산업은행 대구지점으로 사용된 건물을 활용하여 만든 박물관이다 르네상스 양식으로 눈에 띈다

     

    남성로에는 영남대로가 지나가는 중요한 관문인 영남제일관문이 정문 구실을 했다. 영남제일관문은 동구 망우동 공원에 재현되어 있다. 남성로에는 가장 유명한 것이 약령시이다. 조정에 진상할 약재를 수집하거나 일제시대에는 일본에 약재를 수출하기 위해 열린 것으로 추정된다. 약령시 가운데에 있는 한의약박물관은 약령시와 한약재 등의 전시 및 문화 공간으로 조성되어 운영되고 있다 그 옆에는 붉은 벽돌로 지어진 대구제일교회가 있다. 1933년에 지어진 경북 최초의 기독교회로 대구 선교의 역사적 의의를 지닌 곳이다. 현재는 건물 노후로 기독교 역사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약령시를 지나 남성로의 끝에 다다르면 계산성당을 만나게 된다. 1902년에 완공된 것으로 서울과 평양에 이어 세 번째로 세워진 고딕양식이 가미된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이다. 내부의 스테인글라스가 아름답고 박정희 대통령이 육영수 여사가 결혼식을 올린 곳이다

     

    이상화고택
    수성못

    계산성당 인근에 이상화 시인의 고택 앞에는 국채보상운동을 일으킨 서상돈 선생의 고택이 자리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에 다양한 문학인이 대구에 모여 활동하였다. 이장희, 현진건, 이육사, 박목월 등이 있었다. 한편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에서 빼앗긴 들을 많은 사람들이 수성뜰을 지목하고 있다. 수성뜰은 현재의 수성구 일대로 대구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신천과 닿아 있고 최근 휴양장소로 주목받는 수성못이 있는 지역이다. 수성못은 일제강점기인 1925년에 농업용수 공급용으로 조성되었다 수성뜰이 일제의 수탈 대상이 되어서 이상화의 시상의 대상이 되었다고 보고 있다 한편 대구는 편리한 교통 덕분에 상업이 발달하여 평양시장, 강경시장과 더불어 서문시장을 전국 3대 시장으로 유명했다.

     

    청라언덕
    의료선교 박물관

    계산성당의 맞은편으로 길을 건너면 가파른 언덕으로 난 계단이 나오는데 그 계단을 3.1만세 운동길이라고 부른다. 대구는 서울보다 일주일 늦은 191938일에 만세운동이 일어났는데 계성학교, 신명학교, 대구고보, 성서학당 등에 재학 중이던 학생들이 이곳을 지나 3.1운동 집결지로 이동했다고 한다 계단을 지나면 청라언덕에 닿는다. 이은상 시인이 작사하고 박태준 선쟁이 작곡한 동무생각의 배경이 된 곳이다. 청라언덕은 지금의 동산의료원이 출발하게 된 선교사들의 주택이 있다. 스윗즈, 챔니스, 블레어 주택 3동이 아직 남아 있어 드라마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한편 대구의 사과나무는 1899년 청라언덕에 선교사들에 의해 처음 심어졌고 1910년 일본인들이 금호강 주변 지역에 과수원을 조성하면서 본격적으로 재배되었다. 1960년대에는 전국 생산량의 87%를 차지하기도 했다

     

    관덕정 순교 기념관
    대구벌대로
    금호강

    현대백화점 앞 공터에는 최제우 순도비와 천주교 성지 순교기념관이 있다. 이에 앞은 달구벌대로는 대구의 동서를 잇는 주요 교통로로 왕복 10차선이다. 달구벌대로는 옛 대구천의 복개도로이다. 대구천은 금호강의 지류로 대구의 남동쪽에서 북서쪽으로 흘렀는데 도시화가 진행되기 전까지는 주변의 모래톱이 가득한 범람원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평상시에는 빨래터,씨름,강강술래도 하고 전시를 대비한 병영훈련장이기도 했다. 조선말기에 동학과 서학(천주교)이 백성들로 퍼지자 조정은 이들을 무자비하게 박해했다. 동학의 창시자인 최제우가 1864년 사도난정의 죄목으로 관덕정 앞 모래톱에서 순교했다. 병인박해때 경상도에서 붙잡힌 천주교도들도 이곳에서 처형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천주교에서 부지를 매입해 관덕정을 새로 만들고 순교 기념관을 세웠다. 천도교도 동학교조 수운 최제우 순도비를 세웠다 두종교가 서로 순교지로 하나의 공간을 공유하게 되었다.

     

    공산전투
    갓바위

    대구를 대표하는 산은 팔공산이고 여기에는 불교를 대표하는 동화사와 갓바위가 있다. 팔공산은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후백제의 견훤과 마지막까지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신숭겸 장군 등 여덞명의 왕건을 피난시키고 장렬히 싸우다 전사했다 왕건은 공산전투에서 전사한 여덟명의 공신을 기리기 위해 산 이름을 팔공산이라 정했다. 갓바위의 명칭은 팔공산 관봉 석조여래좌상으로 보물 제 431호로 지정되어 있다. 신라시대에 제작되었고 관리는 동화사가 아닌 선본사에서 하고 있다 불상 위에 갓을 쓰고 있어 갓바위라고 부르는데 온 맘을 다해 불상에 기도하면 평생 하나의 소원을 꼭 들어준다고 하여 수능이 다가오면 전국의 수험생 부모들이 갓바위로 모여든다. 또한 팔공산의 능선에 따라 경산시와 경계를 이루는데 갓바위도 그 한 부분으로 논란이 되고 있다

     

    대구하면 대표하는 이미지가 더위일 것이다. 194281일 대구에서 40도를 기록한 것이 2017년까지 우리나라 최고 기온이었다. 그래서 아프리카가 아닌 대프리카로 칭하기도 한다 대구는 여름 기온을 낮추기 위한 노력으로 가로수가 인구대비 가장 많이 심어졌다. 서울시는 시민 37명당 1그루인데 대구시는 시민 14명당 1그루가 심어졌다 국립산림과학원에 의하면 대구에 심어진 플라타너스 1그루는 15평형 에어컨 10대를 네시간 가동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낸다고 했다. 두 번쨰 노력은 신천 정비 사업이었다. 대구는 동서로 개방되어 있고 남북으로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지형이다. 신천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흘러 금호강으로 합류하는 하천으로 대구의 중심을 관통한다. 하천은 증발산 작용으로 주위 기온을 낮춘다 그리고 하천길로 바람이 분다. 미시적 해결책으로는 그늘막 설치와 안개처럼 미세한 물을 분사하는 쿨링 포그 시스템이다

     

    형상기억섬유

    고려 말에 문익점 선생이 목화씨를 중국에서 가지고 와서 경북 의성에서 처음 심었다고 한다. 의성은 마늘과 컬링으로 유명하기도 하다. 목화 재배가 성공한 뒤 10년 만에 전국에서 목화를 재배하기 시작했다. 특히 의성과 가깝고 인구가 풍부한 대구에서 면직물 산업이 성장했다 1915년 중구 인교동에 한국인 자본에 의해 설립된 최초의 섬유 공장인 동양염직소로부터 근대적 섬유산업이 성장하게 되었다. 1920년대에는 달성공원과 비산동 일대에 20여개 공장이 생겨났고 인근의 서문시장과 조화를 이루어 포목점이 성업했다. 1941년 조선방직 대구메리아스 공장이 설립되면서 메리야스 (내의) 공업의 중심지가 되었고 더불어 섬유도시로 급성장했다 6.25이후 1954년 제일모직을 시작으로 근대적 모직물 공업이 발전했고 1963년 한국나일론(코오롱)에서 나일론을 생산하면서 화학섬유 생산이 시작되었다 1970년대는 단일산업 최초로 100억불 수출을 달성하며 호황을 이루었다. 1980년대는 석유파동과 산업구조 변동으로 크게 위축하고 2000년대 들어 탄소섬유 강화플라스틱, 형상기억합금 소재 섬유, 바이오 셔츠 등 기술발전으로 위기를 극복하고자 한다

     

    계림국(신라)
    치맥 페스티벌

    우리나라 치킨 전문점은 맥도날드 매장 수와 비슷하게 약 4만여개가 된다고 한다. 치드님의 성지가 대구라고 한다 대구는 달구벌이라고 불렀는데 달은 크다 구는 언덕 벌은 평야로 큰 언덕과 평야 정도로 해석하는 견해이다 조선시대 한자표기로 바뀌면서 대구로 표기되었다. 다만 구가 공자의 이름과 같다고 하여 다른 구를 사용하게 되었다 다른 하나는 달구는 닭의 방언으로 보는 견해이다. 달구벌은 닭이 많은 평야로 해석된다. 신라의 토템이 닭이고 시조인 박혁거세가 계정 앞에서 알에서 태어났고 신라를 계림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옛전 서문시장에는 1/3이 닭을 파는 곳이었다. 그래서 1970년대부터 대구와 주변 의성, 청도, 경산에는 대규모 양계장이 많이 생겨났다. 계육 가공회사도 더불어 발전했는데 닭발, 닭똥집. 닭내장은 대구를 대표하는 음식으로 자리잡았다. 수성못 주변 닭발집, 동구 평화시장의 닭똥집, 칠성시장 내의 닭내장 볶음집이 대표적이다. 또한 치킨 프라이즈로 멕시칸, 멕시카나, 호식이 두 마리 치킨, 땅땅치킨 등이 대구에서 시작한 기업이고 교촌치킨이은 구미에 본점이 있으나 대구에 분점을 만들면서 기업이 크게 성장한 사례이다. 그리고 2013년부터 두류공원에서 치맥페스티벌을 시작하여 한여름 100만명이 찾는 대구의 대표축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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