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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 쉬는 벼고을 관광도시 김제에 가보면
    아들을 위한 인문학/국내여행 2022. 6. 11. 05:43

    2015년부터 쌀시장이 완전 개방되어 우리 농촌과 농민들이 더욱 힘들어졌다. 공업이 발달하지 않으면 개도국이 될 수 없고 농업이 발달하지 않으면 선진국이 될 수 없다. 프랑스와 독일 등 선진국들은 식량자급률을 높이고 농업을 발달시켰고 2012년 기준 23.6%에 지나지 않았다. 기후변화와 자연재해는 더욱 극심해질 것으로 예상되는데 식량주권은 물론 식량 안보조차 지키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우리나라에서 쌀이 가장 많이 나는 곳이 김제이다

     

    우리나라 국토의 70%가 산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지평선을 볼 수 있는 곳이 김제이다. 북쪽은 만경강, 남쪽으로 동진강이 흐르는 사이에 펼쳐진 광활한 김제만경평야를 가지고 있다. 호남평야의 중심이기도 하고 우리나라에 쌀을 가장 많이 생산하는 고장이기도 하다 쌀과 보리 생산량이 전국 1위이다. 동쪽에는 모악산이 우뚝 솟아 있다. 즉 서쪽부터 바다, 들판, 산이 어우러져있다. 하지만 1987년 대선 공약으로 내세워진 후 1990년부터 시작되어 현재까지 진행 중인 새만금 간척사업의 중심지가 되면서 내륙도시가 되어가는 중이다

     

    평탄한 지형이 된 과정을 살펴보면 중생대 쥐라기에 대규모로 대보화강암의 관입이 있었다. 김제는 그 대보화강암층이 우세한 지역이다. 그 화강암이 심층풍화를 받아 오랫동안 침식당한 결과 현재의 드넓은 평야가 만들어진 것이다. 신생대 3기에 한반도의 북동부가 크게 융기하지만 서남부는 융기가 거의 일어나지 않았고 이후 해수면이 상승하면서 충적지가 발달했다. 김제 본류하천인 만경강, 동진강과 그 지류인 부용천, 두월천, 신평천 등 하천 주변에 충적지가 넓게 발달해서 김제가 우리나라 최대의 충적지를 이룬 것이다.

     

    김제의 도시지형 요소를 보면 전통도시와 식민지형 신흥도시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전북을 보면 전주, 정읍, 태인이 전통적 도시라면 군산, 익산, 김제, 신태인 등지가 식민지형 도시라고 할 수 있다. 김제는 촌락이었으나 1899년 군산의 개항, 1912년 호남선 개통, 일본인들의 이주와 더불어 본격적으로 도시화되었다. 1912년 호남선 철도가 놓이면서 김제역도 생겼고 역 앞에는 일본인 마을이 형성되었다. 군산은 쌀 수탈항이고 김제는 쌀 생산 배후지가 된 것이다 이제는 KTX 무정차역이 되면서 부산이나 인천같은 식민지형 대도시들와 달리 쇠퇴하고 있다 이곳은 백제시기의 저수지인 백골제로 유명하다. 옛 이름은 마한시대엔 벽비리국, 백제때는 벽골군(벼의 고을), 통일신라시대엔 김제(황금들판)였다. 모두 벼와 관련되어 있다.

     

    벽골제 제방은 2.6km정도가 남아 있다. 한때는 약 3.2km에 달했다니 엄청나다. 보수공사에 참여한 인부들이 짚신에 묻은 흙을 털어 모았더니 산이 되었다고 해서 그 산을 산털미산이라고 불렀다. 벽골제 다섯 수문 중 장생거, 경장거 두 개만 남아있다. 제방 안쪽의 넓은 농경지가 다 저수지였던 셈이다 벽골제 저수지는 축조된 후 1600년간 호남평야에 물을 대 주다가 1925년 일본인 지주들이 제방을 관개용 수로로 개조하고 저수지는 농경지로 간척하면서 거의 훼손되었다 지금 복원작업이 계속 진행 중이다 백제는 평야가 많고 벼농사 중심지로 보나 제언같은 관개시설과 농업기술이 발달했다. 삼호라 불리는 김제 벽골제, 정읍(고부)눌제, 익산 황등제가 모두 백제다

     

    김제만경평야

    벽골제는 나라 안의 호수라고 정조실록에는 벽골제 호수의 남쪽을 호남이라고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김제지평선축제의 중심지도 벽골제이다. 6만평 규모로 조성된 벽골제단지를 중심으로 벽골제 서쪽의 광활한 지평선에서 축제가 벌어진다 벽골제단지 한옥마을, 농경문화박물관, 각종 농경문화체험 시설이 있다 조정래 아리랑 문학관도 김제에 있는데 김제만경평야를 배경이다. 10월 초에 열린다 한편 우리나라 농가는 3천평(1헥타르)이하 소농이 66%이상이다. 3헥타르 이상이면 대농이라 할 수 있는데 9%정도 된다. 소농은 아무래도 농가소득을 보전하기가 힘들어 경영규모를 키우려는 노력을 많이 하고 있다 우리농가 중 노인 한두명이 농사를 짓는 경우가 65%이고 농가의 84%가 후계자가 없다. 농가인구는 1990715만명이 2011295만명으로 줄었다. 농가소득도 도시대비 65%수준이다

     

    기업농을 하기에는 산이 많아 적합하지 않고 사계절이 뚜렷해 다품목 소량생산에 더 적합하다고 보고 있다. 이밖에도 기업농은 경제적 관점에 농사를 지으므로 가족농처럼 생태계, 문화적, 정서적 접근이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가족농이 자연과 문화, 식량의 건강한 확보를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월등하다는 것이다. 모악산은 김제와 전주에 걸쳐 있는 노령산맥 자락의 산이다. 이산을 경계로 서쪽은 호남평야, 동쪽은 동부 산간지역으로 나뉘어진다. 1971년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고 옛날엔 엄뫼, 큰뫼라고 불렀다. 둘다 아주 높은 산이란 뜻으로 후에 한자가 들어오면서 엄뫼를 어머니산으로 의역해 모악이라 불렀다. 따라서 위대한 어머니의 산이 되었다

     

    또한 모악산 주변은 사금산지로 금 관련 지명이 많다. 김제, 금구,, 김천, 차례로 금이 나오는 제방, 금이 나오는 도랑, 금이 나오는 냇가라는 의미다. 이지역들에서 1900년대초부터 사금채쥐가 시작되었고 한때 골드러시가 있었다. 모악산은 미륵신앙의 본거지로 신흥종교의 성지로 불린다. 불교가 들어오기 이전부터 신선사상이 뿌리내린 성산으로 추앙받는다. 계룡산과 더불어 각종 토착종교의 산실로 도를 닦는 사람들이 수련하는 영험한 산으로 알려졌다. 미륵신앙은 혼탁한 말세를 구원할 미륵불을 믿고 기다리던 신앙이다. 그래서 견훤도 미륵을 자처하며 모악산 전주를 도읍 삼아 후백제를 세웠고 정여립은 모악산 자락에서 새 세상을 꿈꾸며 세력을 모았던 것이다. 전봉준의 동학농민군은 모악산 아래 금구, 원평에서 세력이 크게 확장됐으며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이나 선각자들이 미륵과 신선이 뒤섞인 황금들판의 산에 모여들었다

     

    대원사 칠성각과 원평장터

    그런 기풍이 조선시대 말에는 개벽사상으로 이어졌다. 모악산은 낡은 시대가 가고 새로운 시대가 열린다는 후천개벽사상이 사작되고 확대되는 기지가 됩니다. 동학농민운동이 원평장터에서 궤멸된 후 모악산에 다시 증산 강일순이라는 인물이 출현했다. 증산은 모악산 동쪽에 있는 대원사에서 득도하고 모악산 서쪽의 제비산 자락의 구릿골이라는 마을에 터를 잡고 9년 동안 교리를 설파했다. 증산 이후 증산도의 수많은 종파가 생겼다. 현재는 모악산 자락에만 증산교 교파가 35개 이상이라고 한다 증산이 새로운 세상을 설파한 금산면의 구릿골이다. 주로 동곡약방에서 교리를 설파했다고 한다. 구릿골 주변엔 증산이 교리를 설파한 곳, 살았던 곳, 시신이 안치된 곳 등이 산재되어 있다. 그래서 모악산 구릿골 일대를 증산교 성지라고 한다

     

    모악산의 명소 중의 명소는 금산사이다. 절터가 엄청 넓고 큰 건물들이 우뚝 서 있어 위용이 대단하다. 본당인 금산사 미륵전은 무척 유명하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볼 수 있는 3층 법당이다. 거대한 미륵입상이 있느데 높이가 무려 12m나 됐다. 금산사는 신라 불교의 주류였던 교종 계통 법상종의 중심 사찰이었고 법상종이 미륵신앙을 기반으로 하는 종파라 석가모니불을 모신 대웅전보다는 미륵불을 모신 미륵전이 절의 중심이고 미륵신앙의 중심 사찰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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