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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의 탁류를 건너 서해안 시대를 열어가는 군산을 가보면
    아들을 위한 인문학/국내여행 2022. 6. 4. 04:21

    군산은 채만식 소설 탁류로 알려진 도시로 군산은 일제의 억압과 조선인의 아픔을 고스란히 담은 곳으로 채만식문학관, 채만식생가터가 있다. 탁류길로 여행경로로 만들어져 있기도 하다. 한편 서천과 군산은 금강의 하구둑을 사이에 두고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금강을 정기적으로 운행하는 연락선이 운영되었다. 군산의 수산물이 연락선을 이용해 충남내륙지방까지 운반되었다 1934년 서천군 장항읍과 군산간 뱃길이 200910월을 마지막으로 운행이 중단되었다. 하굿둑이 건설되고 도로와 철로가 하굿둑을 통과하면서 경제성이 없어 폐쇄되었다.. 고려말 최무선이 진포에서 왜구를 물리쳤다는 곳이 바로 군산이다

     

    군산근처는 온통 평야로 쌀미나 들야로 들어간 지명이 많다. 일제강점기 군산에는 큰 정미소도 12군데나 되었다. 그 쌀이 일본으로 반출되고 농민들은 쌀 구경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중 전국 최대 규모의 개인농장을 소유했던 구마모토 별장으로 이영춘 가옥으로 알려진 곳으로 농장에 철도까지 개설될 정도로 굉장히 컸다. 군산에 들어가면 군산근대역사박물관이 있고 군산세관이 근처에 있다. 1900년에 건립되어 일제강점기부터 최근까지 세관을 지었는데 벽돌까지 수입해서 지은 것으로 당시 군산세관은 서양 건축양식이 도입된 초기에 지어진 서울역, 한국은행과 같은 양식의 건물이었다.

     

    개항장

    군산은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부산, 원산, 인천, 목포, 진남포, 마산에 이어 18995월 개항되었다고 한다. 일제에 강제 병합한 후 군산은 한가한 어촌마을에서 한순간에 호남 제일의 항구가 되었다. 그리고 전주와 군산간에 자동차가 다릴 수 있는 큰길이라는 의미의 신작로를 만들었다. 그 구간에 벚꽃을 많이 심었는데 벚꽃은 대략 60년이 수명이고 지금 전군가도에서 볼 수 있는 벚꽃나무는 1975년 국가, 시군비, 재일교포들이 700만원을 기증해서 심은 것이다 또한 군산은 일본 지주들이 평지에 집을 지었고 농가들은 산속에 토막집을 짓고 산에서 무리를 지어 산촌을 형성하였다.

     

    탁류에 나오는 미두장비도 있다. 미두장은 미곡 거래할 때 현실의 미곡 거래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미곡 시세의 등락을 이용해 약속으로만 매매하는 투기행위를 말한다. 미두에 종사하는 사람을 미두장이, 미두꾼이라 부르고 미두꾼이 모여서 미두 거래를 하는 장소를 미두장이라 불렀다. 미두장은 일제의 조선 토지 수탈 방법의 일종이었다. 군산은 인천과 마찬가지로 썰물 때 접안이 힘들어 뜬다리부두의 특별 항만시설이 필요하다. 19344기의 접안교가 완공되면서 쌀 반출량이 200만석이 넘게 되었고 기공식에 총독도 참석하여 수탈의 흔적을 알 수 있다. 또한 개업한지 60년이 된 빈해원이 있고 군산은 잠뽕으로 유명한 곳이 여러군데 있었다. 잠뽕의 기원은 나가사키 잠뽕으로 복건성 출신 화교가 가난하고 배고파 싸게 저렴하게 먹을 수 있는 것을 만들면서 나온 것으로 나가사키는 군산과 교류가 있어 생겨난 것이다. 한편 1970년대 접어들어 화교의 재산을 제한하자 해외로 떠나가면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인수하여 한국식 입맛에 맛게 고춧가루를 넣어 만든 것이다

     

    군산에는 빵집이 유명한데 군산 명소인 이성당은 일본인이 운영하다가 해방 이후 우리나라 사람이 다시 문을 연곳이다. 일본은 빵을 군용식품으로 쓸 생각으로 도입했다. 처음에는 서양 이스트 냄새에 익숙하지 않아 있기가 없었다. 그래서 일본인에게 익숙한 술에서 얻은 누룩으로 발효시키고 팥소를 넣은 빵을 만들어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그래서 일본은 단팥빵이 아직도 인기다. 따라서 중국에서 건너온 팥과 서양의 이스트를 대신한 누룩으로 발효시킨 단팥빵은 대표적인 화혼양재의 사례이다. 돈가스도 그렇다. 서울 남산의 왕돈가스가 유명한 것처럼 군산에도 돈가스가 유명하다. 한편 동국사는 일본 사찰로 식민지의 흔적이 남아 있다

     

    군산항과 군산 시내를 연결하기 위해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해망굴은 건설 당시 조선인 노동자를 엄청나게 착취했다고 한다. 일제가 군산시내에 자리잡으면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언덕 위, 산 중턱, 군산 외곽으로 삶의 터전을 옮겨가게 되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동네가 해망동이다. 재개발로 다시 터전을 잃어 떠나게 되었는데 해방이 되어도 달라진 것이 없다고 개탄할 만 하다. 한편 서천군 장항에서 군산의 해망동 쪽으로 연결되는 다리가 군장대교이다. 따라서 수산시장이 활발하였고 특히 일본인이 먹지 않는 박대생선이 인기였다 생선을 말리는 것도 일제시기였다

     

    새만금산업단지와 군장산업단지가 상당히 넓게 있다. 산위에 풍력발전기가 있어 해안의 특이함을 더한다. 마지막으로 새만금방조제인데 세계 최장인 33.9km20108월에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다. 배수갑문을 보면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배수갑문을 통해 바다에서 육지로 육지에서 바다로 물이 들어온다. 새만금의 명칭은 전국 최대 곡창지대인 만경평야와 김제평야가 합쳐져 새로운 땅이 생겼다는 의미로 만경평야의 만과 김제평야의 금자를 따서 지은 것이다. 그러나 간척사업이 이루어지는 동안 갯벌이 사라지고 매립을 위해 많은 산지도 사라지게 되었다. 환경문제도 파생되고 새만금방조제 인근 주민의 생계도 문제이다.

     

    일제강점기 건물을 복원해서 많은 사람들이 군산을 찾고 있지만 역사는 잊고 그저 영화 속 한 장면 또는 줄 서서 먹어야 하는 먹거리의 매력 정도로만 빠진다면 아쉬운 일이다. 역사는 흘러간 과거가 아니라 우리의 미래를 비추는 거울이다. 군산시의 표어가 드림허브인데 서해안시대의 꿈이 이루어지는 허브도시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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