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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 11세기 9재학당을 설립하여 고려 유학을 발전시킨 최충에 대해서
    아들을 위한 인문학/한국사 2022. 5. 4. 03:06

    거란의 침입과 전화가 아문 뒤 세상은 태평해졌지만 중앙 정부가 교육까지 돌아볼 여력은 없었다. 중앙의 교육기관인 국자감은 유명무실한 상태였고 지방의 향학은 갖추어지기 이전이었으므로 교육에 대한 새바람이 절실하던 때였다. 문종때 고려 유학을 꽃피우게 한 최충은 984년 해주 최씨 최온의 아들로 출생했다. 부친인 최온은 향리 출신으로 해주부터 학문을 좋아했고 글짓기를 잘했다. 또 풍채가 뛰어나고 성품과 지조가 굳건했다. 1005년 목종때 약관 스물살의 나이에 최충은 과거시험에서 갑과 1등으로 합격한 뒤 벼슬길에 나아갔다.

     

    최충의 글씨

    최충은 관료생활 동안 현종, 덕종, 정종, 문종에 이르는 네 왕을 섬겼다. 재상이 되자 법률관을 동원하여 기존의 율령을 개정하고 서산을 고정하는 작업과 형법을 정비하는 작업에 참여하는 등 제도정비에 주력했다. 문종대에 이루어진 수많은 법제도의 정비는 사실상 최충이 재상 시절에 일궈낸 업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재상으로 소임을 다했다고 느낀 최충은 1053년 문종의 만류를 뿌리치고 은퇴를 결심했다. 그때 그의 나이가 70세로 40년간의 기나긴 벼슬생활을 마감한 노재상의 앞에는 또 다시 후진양성이라는 새로운 사명이 놓여 있었다

     

    노동서원(홍천)

    국자감의 부실한 교육여건을 목격한 최충은 세인들의 절실한 요구에 부응하여 자신의 집에 사숙을 열고 제자들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최충이 사숙을 운영한다는 소문이 나자 여기저기서 모여든 학도들로 그의 학당은 금새 문전성시를 이뤘다. 최충은 교육장소를 송악산 아래 자하동에 마련했는데 모여드는 학도가 너무 많아 인근 거리까지 넘칠 정도였다. 넘치는 학생들을 모두 수용하기 위해 만든 것이 바로 9재 학당이었다. 전국에서 수많은 학생들이 몰려든 것은 최충의 명성탓이기도 했지만 그가 활동하던 문종 초기에 문반 현직자를 우대하는 정책과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 더욱이 왕실과 더불어 외척세력이 부상함에 따라 이들과 대결하기 위해 실력이 필요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과거에 급제해야만 했다.

     

    삼국시대 유학 발전
    유학의 일본 전래

    그가 사숙을 열자 문전성시를 이루게 된 것은 이러한 사회 분위기가 작용했기 때문이다. 이때 세워진 9재는 악성, 대중, 성명, 경업, 조도, 솔성, 진덕, 대화, 대빙 등 9개로 분류되었는데 이것은 진학의 순서와도 관련이 있었다. 초학자는 먼저 악성재에 들어가 6재를 익히고 다음 순차적으로 여러 재를 거쳐 마지막에 대빙재에서 수학함으로써 졸업하는 것이다. 9재 학당의 교과서는 9경과 3사였고 이것은 철학적인 궁리공부에는 못 미치고 과거시험을 위주한 교육이주를 이루고 있었다. 대개 9경은 주역, 서경, 시경, 의례, 주례, 예기, 춘추좌씨전, 공양전, 곡량전, 3사는 사기, 한서, 후한서인 것으로 보고 있다.

     

    최충
    고려 과거제
    각촉성편(각촉부시)

    최충은 93사를 중심으로 학도들의 최대 희망이기도 한 과거시험 교육에 매진했지만 이와함께 시와 문장을 가르치는 일도 빠트리지 않았다. 최충은 여러번 지공거를 거쳤으므로 과거에 응시하려는 학도는 먼저 최공도에 끼어 공부하기를 소원했다. 매년 여름철에는 귀법사의 승방을 빌려 여름학기 강습을 운영해야 될 정도로 그 열기가 뜨거웠다. 최충은 간혹 이름난 선비들이 찾아오면 여러 제자들과 더불어 초에 금을 그어놓고 그 금까지 타기 전에 시를 지어 읊는 각촉부시라는 시 짓기 대회를 열어 성적대로 차례로 앉히고 술잔을 돌리는 행사도 열었다. 각촉부시가 진행하는 동안은 그야말로 진퇴의 절도의 장유의 서열이 분명할 뿐만 아니라 종일토록 수창하는 모습이 절서정연하고 의식을 갖추었으므로 보는 사람마다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문헌공도

    최충의 교육사업은 큰 반향을 일으켜 과거 볼 사람은 저마다 먼저 그의 학도가 되기를 원했으며 그의 모임을 모방하여 개경에만도 11개소 전국에 12개의 사학이 세워지게 되었다. 그 가운데에 최충의 학도가 가장 권위가 있었으며 성황을 이루었다. 한국 사립학교의 원조이자 해동공자로 칭송되었던 최충이 고려중기를 대표하는 역사적인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문은 별로 남아있는 것이 없다. 무신란 이후 문신이 많이 살해되고 그들의 문집도 함께 없어졌기 때문이다. 최충의 9재학당에서 배운 학도들의 명성은 국학인 국자감을 능가하여 이에서 공부한 학도들을 최충의 벼슬이름을 따 흔히 시중 최공도라 일컫어졌으며 그가 죽은 후에는 시호를 따라 문헌공도라고 불렀다. 은퇴한 이후로 사학 발전에 온 힘을 기울인 최충도 노쇠함을 견디지 못하고 그만 86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최충은 일명 해동공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가 해동공자라는 칭호를 듣게 된 이유는 다름 아니라 9재에서 많은 인재를 양성했기 때문이다. 공자가 많은 제자를 양성했는데 몸소 육에 능통한 자가 70여명이었다고 한다. 최충은 9재를 세워 많은 인재를 양성했기 때문에 공자와 견주어 해동공자라는 칭호를 얻었다. 그러나 이 점은 오히려 최충의 사후 그에서 불리하게 작용했다. 조선시대 유학자들은 최충을 단지 과거시험교육에 전념한 학자로 이해했고 또 불교문자를 썼다는 이유로 그를 문묘에 배향하는 것을 거부했다. 동방 성리학의 비조로 정몽주를 높이 평가하여 문묘에 배향한 것에 비하면 초라한 평가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동방학교의 홍함은 대개 최충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표현에서 보듯이 그를 단지 교육에 공이 있는 인물로만 평가하였던 것이다. 최충이 그나마 서원에 배향될 수 있었던 것은 최초로 백운동 서원을 세운 주세붕에 의해서였다. 1554년 황해도관찰사로 있으면서 고적을 탐방하던 중 최충의 고향인 해주 수양산 잡초 덤불 속에서 그의 사당을 발견한 것이다. 주세붕은 폐허가 된 사당의 누추한 모습에 한탄하며 그곳에 수양서원을 세우고 최충을 배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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