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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시대의 혈통이냐 명분이냐로 예론과 당쟁의 시대를 살펴보면
    아들을 위한 인문학/한국사 2022. 3. 28. 03:40

    조선왕조의 지배층은 주자학을 선봉하는 양반 사대부들이었다. 따라서 국가의 지배사상으로서 주자학의 영향력이라는 것은 막대하였다. 14-15세기 주자학이 국가통치 이데올로기로 자리잡으면서 조선시대는 이전의 불교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던 고려시대와는 상당히 다른 사회로 변화해갔다. 가묘, 가례, 소학 등이 보급되면서 이전의 불교윤리는 유교윤리로 대체되고 전국에 퍼져 있던 불교사원들이 사라지는 대신 점차 서원이 발달했다

     

    주자학을 신봉하고 지방에 경제적 기반을 준 이들 사림세력들은 15세기 중종대 조광조의 등장을 계기로 정계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기반인 지방에 향촌 자치규약인 향약을 전파하여 향촌을 교화 와 지배하고자 했다. 그 과정에서 일어난 사화는 중앙세력인 훈고파와 지방세력인 사림파간의 지배권 다툼이었다. 그러나 선조조 이후 사림세력이 정권을 잡은 뒤에는 사림들간의 정권다툼인 이른바 당쟁이 일어나기 시작됐다

     

     

    조선조기는 당파를 만드는 것은 망국의 원인이라 하여 이를 엄금했다. 그러다가 사림이 집권하면서 소인은 붕당이 없고 군자는 당이 있다고 한 구양수의 붕당론과 모든 당을 군자당으로 보고 그중에서 선류만을 쓰면 된다고 한 이이의 붕당론을 바탕으로 새로운 붕당관이 정립되었다. 이로부터 동인, 서인, 노론, 소론, 남인, 북인 간의 밀고 당기는 당쟁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당쟁은 단순한 당파간의 이해관계에서 출발한 권력투쟁만은 아니었다. 성리학의 무장한 지식 엘리트 관료들의 물러설 수 없는 명분 논쟁이며 정쟁이었던 것이다

     

    16세기 이후 성리학은 이기심성론 등이 전개되면서 이론적 심화를 이루었다. 이를 바탕으로 17세기에 들어와서는 현실에 대한 구체적 적용이라 할 수 있는 예학이 발달했다. 당쟁은 이러한 예학의 발달을 기반으로 한 왕실의 예론 문제였다. 따라서 예론의 핵심은 왕실의 예를 왕조례인 오례에 맞출 것이냐 사대부례인 사례에 맞출거냐의 대립이었다

     

    인조는 반정으로 왕위에 등극하여 선조를 계승했는데 선조는 그의 할아버지였다. 그런데 성리학의 종법상으로 손자가 할아버지를 바로 계승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자연히 인조와 선조 간의 관계설정의 문제가 되었다. 이때 예학의 거두 김장생은 왕조례의 특수성을 강조하여 선조대왕을 직계승했으므로 선조를 아버지라 부르고 생부인 정원군을 백숙부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박지계는 혈통을 중시하여 사대부가와 마찬가지로 정원군을 아버지로 불러야 한다라며 맞섰다. 그런데 박지계의 말대로 하자면 자연히 정원군을 왕으로 추숭하여 종묘에 모시고 선조와 인조 사이를 잇게 해야만 했다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는 명분을 획득하여 자신의 지위를 안정시키고 싶었다. 따라서 인조는 내심 아버지 정원군을 원종으로 높이고자 했다. 왕의 의중을 읽은 반정공신들은 인조를 지지했고, 정원군이 원종으로 추승됨을써 이 논쟁은 일단 종결되었다. 김장생 등의 사림계 서인들의 정권을 좌지우지하던 17세기 중엽 이후 예론은 혈통보다는 주자학적인 명분이 더욱 중요시되었다. 예학 논쟁은 이른바 예송으로 이어졌는데 예송은 권력투쟁의 한 양상이었다. 왕위계승, 왕세자 책봉, 국혼 등 정치적 이해관계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고, 이것에 따라 정국의 판도가 뒤바뀌어갔다

     

    이러한 권력다툼 속에서 오히려 숙종은 서인과 남인 등 당파들 간을 상호견제시킴으로써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다. 그의 의지는 영정조대 탕평졍책으로 이어져 노론과 소론을 공평히 등용하는, 보다 완속한 붕당정치가 이루어지는데 바탕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정조가 죽고 어린 순조가 즉위하면서 몇몇 노론가문만의 세도정치가 시작되어 조선조 당쟁도 막을 내렸다. 당쟁은 그동안 일제시기 식민사학에 의해 망국의 요인으로 설명되었다. 따라서 조선시대 극심한 당쟁은 파당적인 민족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당쟁연구가 심화되면서 긍정적인 해석이 나오기 시작했다. 당쟁은 성리학의 이념 아래 정치적 갈등을 해소하고자 한 문신들의 공론정치로 파악한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당쟁은 주자학적 명분을 중시했던 조선시대 문치주의 한 단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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