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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의 주자가 되고 싶었던 송자인 송시열의 발자취를 걸어보며
    아들을 위한 인문학/한국사 2022. 4. 1. 03:15

    노론(송시열)과 소론(윤증) 분당

    조선의 송시열의 나라라고까지 연상하게 만든 우암 송시열은 조선후기 정치계와 사상계를 호령했던 인물이다. 조광조와 더불어 조선을 유교의 나라로 만든 장본인이었던 그는 우리나라 학자 중 자를 붙인 유일한 인물로 역사상 가장 방대한 문집인 일명 송자대전을 남겼다. 물론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개개인마다 시대마다 다르겠지만 그가 조선시대에 끼친 영향력에 대해서는 이의가 없을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 3천번이나 그 이름이 등장하는 인물로 사약을 받고 죽었음에도 유교의 대가들만이 오르다는 문묘에 배향되었고 전국 23개 서원에 제향되었다. 그의 죽음은 신념을 위한 순교로 이해되었고 그의 이념을 계승한 제자들에 의해 조선사회는 움직였다

     

    송시열은 은진 송씨로 아버지는 송갑조이며 어머니는 선산 곽씨이다. 그의 집안이 회덕에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은 9대조인 송명의가 회덕으로 장가들면서부터다. 송시열은 외가가 있는 옥천 적등강가 구룡촌에서 태어났다. 송시열이 친가가 회덕으로 간 것은 여덟 살 되는 1614년이다. 이때 친족인 송이창 집에서 송이창의 아들이자 쌍정당의 7대손인 송준길과 함꼐 수학했다. 송시열의 학문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주자와 율곡이었다. 그렇게된 데는 부친의 영향이 컸다. 송갑조는 송시열이 열두살 때 주자는 훗날의 공자다. 율곡은 훗날의 주자다. 공자를 배우려면 마땅히 율곡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라며 주자와 이이, 조광조 등을 흠모하도록 가르쳤다. 1630년에 송시열은 율곡의 학문을 계승하기 위해 율곡을 정통으로 계승한 김장생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했고 이듬해 김장생이 죽자 그 아들 김집 문하에 들어갔다

     

    증주벽립 각자바위

    인조 111633년 송시열은 27세 나이로 일음일양지위도를 시제로 논술하여 생원시에 장원급제하였고 최명길의 천거로 경릉참봉에 제수되었으니 곧바로 사직하고 송준길과 영남을 유람하며 세월을 보냈다. 그러다가 163511월에 훗날 효종이 되는 봉림대군의 사부로 임명되었다. 이후 약 1년간에 걸친 사부생활로 효종과의 깊은 유대와 함께 북벌계획을 도모하는 계기가 되었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의 비극은 송시열의 전 생애에 걸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절친한 동문인 윤선거와도 갈등을 빚었고 윤선거의 아들이면서도 그가 총애한 제자 윤증과도 결별함으로써 노론과 소론의 분쟁도 일어났다

     

    기축봉사(북벌론 근거)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 청과 굴욕적인 강화를 맺게 되자 송시열은 관직 생활의 뜻을 접고 충북 황간으로 낙향하여 한천청사를 짓고 북벌계획을 구상하며 강학에 힘을 기울였다. 낙향한 그를 인조가 여러차례 불렀지만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송시열의 나이 43세인 1649년에 효종이 즉위하자, 효종은 대군으로 있을 때 사부였다는 인연으로 송시열을 불러 곁에 두고 싶어했다. 효종은 즉위하면서 재야에서 학문에만 전념하던 산림들을 대거 중앙 정계에 등용하고자 했고 대표적인 인물이 스승인 송시열이었다. 송시열은 1649년 기축봉사를 올려 북벌론의 합당함을 제시하고 북벌이야 말로 국가대의라는 것을 표방했다

     

    송시열에게 중국의 주인은 여전히 청이 아닌 명이었다. 청의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는 현실인식은 송시열에게는 패륜이자 반역과 같은 것이었다. 효종이 즉위하자마자 송시열은 현실로 굳어진 국제한계를 무시하고 유교적인 가리침대로 명을 위해 복수해 줄 것을 당부하고자 했다. 송시열에 대한 효종의 대우는 지극했다. 왕이 청에 대한 북벌을 계획할 때면 사관이나 승지마저 멀리할 채 독대로 의논할 정도였다. 송시열이 조정의 대신으로 효종과 국사를 의논한 기간은 너무 짧았고 효종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함께 서인의 영수로서 정치적 부침이 시작되었다

     

    윤휴

    송시열은 주자를 신앙으로 삼을 정도로 주자 제일주의자였다. 송시열은 주자의 남송시대가 자신의 시대와 유사하다고 믿은 인물이었다. 내우외환이라는 주자가 당면했던 문제가 조선의 당면 문제와 유사한 것으로 보았고, 그로 인해 주자가 제시했던 대책은 지금에도 적용된다고 생각했다. 송시열은 유학의 정맥이 윤휴 등에 의하여 심하게 훼손되었다고 생각했고 주자의 학설을 비판한 윤휴를 사문난적으로 몰았다. 윤휴에 대한 송시열의 반감은 훗날 그가 총애하던 제자 윤증가 불화하는 이른바 희니시비라는 노소분당으로까지 비화되었다. 회덕에 살던 송시열과 니산에 살던 윤증은 사제지간이었고, 윤증의 부친인 윤선거는 사계 김장생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사이였다. 생전에 율곡의 연보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윤선거가 윤휴의 논지를 인정하는 뜻을 비춘 적이 있었는데 윤선거는 송시열과 윤증 사이를 원만하게 이끌려는 것이었지만 송시열은 윤선거가 윤휴를 두둔해주었다고 생각했다

     

    윤선거가 166966세의 나이에 별세하자 그의 아들 윤증은 박세채가 써준 행장을 가지고 송시열에게 부친의 묘갈명을 써줄 것을 부탁했다. 윤증의 부탁을 받은 송시열은 마지못해 박세채가 윤서거를 칭송하는데 나는 박세제를 믿으니 그의 말을 술이부작한다고 했다. 이는 윤선거를 칭송하지 글을 쓰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윤선거 묘갈명을 계기로 스승인 송시열과 제자 윤증의 사이는 멀어져 갔다

     

    화양서원 배치도

    1660년 송시열은 효종의 장지를 잘못 옮겼다는 탄핵을 받았고 국왕 현종에 대한 실망감으로 벼슬을 버리고 화양동으로 은거했다. 16668월 화양동으로 거주지를 옮긴 송시열은 이후 1688년까지 화양동을 출입하며 산수를 즐겼고 강학을 하며 제자들을 길렀다. 화양동으로 삶의 터전을 옮긴 뒤에도 1668년 우의정에 올랐으나 좌이정 허적과의 불화로 사직하였고 16742월 효종비 인선왕후의 복제문제로 실각을 경험하기도 했다. 결국 이듬해 송시열은 유배되었다가 1680년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재집권하자 석방되었다

     

    우암사적공원

    송시열의 나이 83세인 16891월 숙의 장씨가 아들(경종)을 낳자 원자의 호칭을 부여하는 문제로 서인이 실각하고 남인이 재집권하였다. 송시열은 왕세자가 책봉되자 시기상조라며 반대하다가 결국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송시열은 다시 정계로 복귀하지 못하고 서울로 압송되던 중 사약을 내리려고 오던 금부도사 행렬과 63일 마주쳤다. 송시열은 사약 사발을 자진하여 마시고는 영욕이 교차하는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감했다. 이때 자손에게 남긴 친필유서가 아직도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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