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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왕궁이 동물원으로 바뀐 창경원에 마지막 황제인 순종이 거닐며 한탄했다고 하는데
    아들을 위한 인문학/한국사 2022. 7. 22. 05:36

    190911월 조선의 마지막 임금 순종 황제가 새로 다듬어진 궁궐 뜰을 돌아보고 있었다. 궁궐 여기저기가 헐린 자리에 신식 건물과 동물 우리들이 마구잡이로 들어선 터이다. 순종황제는 아침부터 일본 통감부에서 가져온 모닝코트를 입어야 하였다. 대한제국 황제에게 입는 옷이 아닌 서양정장으로 입으므로 독립군의 황제의 존재를 지우려고 하는 것이다. 일본은 순종 황제를 위로한답시고 창경궁 안 여기저기를 험루고 동물원과 식물원, 박물관을 세웠다. 그리고서는 창경원이라 이름 붙여 원이라는 한가롭게 노니는 정원으로 만든 것이다. 양반조차 함부로 쳐다보지 못하던 임금의 지엄한 궁궐이 이제 아무나 들어와 짓밟고 다니는 평범한 공원이 되어 버린 셈이었다

     

    창경궁

    항간에는 동물원을 귀신이나 마귀가 세웠다는 둥, 길거리를 떠돌아다니는 개란 개는 다 잡아다가 먹이로 준다는 등 소문이 돌고 있고 심지어 사람 머리에 개의 몸을 한 마귀가 있다는 괴소문까지 돌았다. 한편 일제에 의해 조성된 창경궁의 동물원은 세계에서 36번째, 아시아에서 7번째로 만들어진 근대적 동물원이다. 일제는 서양 제국의 국가들을 따라 하기 위해 애를 썼다. 그래서 수도인 도쿄에 근대적 동물원을 먼저 세웠고 이를 그대로 따와서 조선에도 만들었다. 그 당시 초대 조선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와 이완용은 순종을 위로한다는 핑계를 대며 창경궁에 동물원 등을 세웠다 그래서 궁 대신 원을 사용해 창경원이라는 이름을 붙여 격을 낮추었다. 그후 순종은 창경원 전하라고 불리기까지 하였다

    일제는 창경궁 안에 있던 문정전 등 웅장한 궁궐 건물 여러 채를 무참하게 허물고 거기서 나온 자재를 경매로 팔았다. 또 대대로 왕이 직접 농사를 지어 백성들에게 모범을 보이던 벼농사 터인 대농포를 파헤쳐 춘당지라는 연못을 만들고 그 옆에 일본식 정자인 수정궁을 세웠다. 또 벚나무를 궁궐 사방에 심어 봄이면 벚꽃놀이를 하라고 부추기까지 했다. 창경원의 동물원에는 총 73358마리의 동물이 전시되었다. 인도에서 코끼를 구입하고 춘천 등지에서는 호랑이를 잡아 들였다. 시베리아 호랑이, 반달곰, 쌍봉낙타, 일본원숭이, 캥거루, 타조도 있었다. 창경원은 처음에 월요일과 목요일은 순종 황제가 이용하고 나머지 날에 백성들에게 개방했다. 그러다가 1910년 국권을 빼앗긴 뒤로는 일반 대중들이 이용하는 공원으로 바뀌었다. 그후 창경원은 일본인과 돈 많은 조선 사람들에게 재미있는 구경거리를 제공하는 곳이 되었다. 그리고 1945년 태평양 전쟁 막바지에 일본은 연합군의 폭격에 대비해 일본과 조선의 동물원 맹수를 독살하는 명령이 내려져 죽였다고 한다

     

    조선은 성리학의 가르침을 따르는 왕과 선비들이 다스리는 나라로 조선시대 선비들은 동물을 기르는 취미에 빠지는 걸 항상 경계했다. 인격을 갈고 닦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렇다고 동물을 함부로 대하거나 멀리했던 건 아니다. 의식주에 필요한 가축을 돌보고 가끔은 코끼리와 원숭이의 희귀 동물을 외국에서 선물로 받아 키우기도 했다. 심지어 세종과 영조는 건강을 위해 동물을 약재로 쓰자는 신하들의 청을 물리치고 그렇게 하면 동물이 남아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사람들은 또한 넉넉지 않던 시대에 동물을 키우는 취미는 사치스러운 것으로 보았다 18세기에는 실학사상의 도입으로 조선에서도 과학적 시선으로 동물을 바라보면서 앵무새, 비둘기, 물고기 등을 키우는 선비들이 늘어났다. 집비둘기를 완벽하게 분석한 실학자 유득공의 책 <발합경>은 변화하는 시대 분위기를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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