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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실학을 집대성하고 부국강병을 꿈을 꾸었던 정약용은 어떤 분인가 ?
    아들을 위한 인문학/한국사 2021. 12. 28. 05:07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조선왕조는 점차 정치와 사회질서가 와해되기 시작하고, 서민들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다. 게다가 조선조 성리학의 형식적이고도 공리공답적 성격은 유학자들 사이에도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현실의 부조리와 모순, 그리고 양반층의 부패에 대한 자성의 움직임이 일어난 것이다. 조선후기 성리학을 배격하고 실천윤리와 도덕을 주창함으로써 사회현실에 대해 비판적인 학자군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소위 실학자라고 불리는 이들은 기존 양반들과 달리 주자학만의 사유에서 벗어나고자 했으며 사회 부조리를 해결하고자 했다

     

    실학은 17세기 유형원, 이수광 등으로부터 시작되어 18세기 이익, 안정복, 이중환 등 성호학파를 거쳐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유등공 등 북학파들에 의해 발전했다. 이들 실학자들은 사회현실에 대한 비판뿐 아니라, 각 분야의 학문을 발전시키며 인간과 세계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했다

     

    실학사상은 다산 정약용에 와서 더욱 구체적되었다.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다산 정약용은 한국 최대의 실학자이며 개혁가이다. 실학자로서 그의 사상을 요약하면 개혁과 개방을 통해 부국강병을 주장한 인물이라 평가할 수 있다. 그가 한국 최대의 실학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자기시대의 문제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그에 대한 개혁 방향을 제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정약용을 떠올리면 오랜 시간 동안 겪어야 했던 귀양살이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귀양살이는 그에게 깊은 좌절도 안겨주었지만 최고의 실학자가 된 밑거름이기도 했다. 정약용은 23세에 이벽으로부터 서학에 관하여 듣고 관련 서적들을 탐독했다고 했다. 하지만 서학에 심취했던 과거로 인해 순탄치 못한 인생을 살아야 했다. 정약용은 20대 초반에 서학에 매혹되었지만 이후 제사를 폐해야 한다는 주장과 부딪혀 서학에 손을 끊었다고 하지만 천주교 관련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오해를 받았다

     

    거중가
    배다리

    정조시대의 관료생활은 탄탄대로였다. 정조의 최측근으로서 승승장구하며 주교사의 배다리 설계, 수원성제와 기중가 설계 등 빛나는 업적도 많다. 정약용은 이상적인 관료였다. 배다리와 기중가의 설계에서 이미 재능을 펼쳤지만, 그의 저서에서 엿보이는 정치관은 기본적으로 민본이었다. 정약용은 왕정시대에도 주민 자치가 실현되기를 소원한 인물이다. 조선후기에 살았던 인물이지만 소박하게나마 민주주의를 지향한 인물이다

     

    정약용의 산수화

    정약용은 관직에 나간 지 2년만에 당색으로 비판된 것에 불만을 품었다가 해미에 유배되었으나 정조의 배려로 열흘 만에 풀려났다. 하지만 정조가 승하한 이듬해 1801년 순조때 신유사화가 일어나면서 주변 인물들이 참화를 당했고 손위형인 정약종도 참수를 당했다. 겨우 목숨을 부지한 정약용은 그해 2월에 장기로 유배되었다가 11월에는 강진으로 옮겨졌다. 18년 동안 긴 강진 유배생활의 시작되었다

     

    남양주의 정약용 생가

    유배지에서 천주교인으로 소문이 나면서 배척받아 어려움이 있었으나 승려 혜장 등과 교유하고 제자들을 키우며 저술활동에 전념했다. 담배 역시 유배의 시름을 덜어주는 벗이었다. 정약용이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인 마현으로 돌아온 것은 1818년 그의 나이 57세때였다. 그는 75세 세상을 떠날때까지 자신의 학문을 마무리하여 실학사상을 집대성했다

     

    정약용은 주자학적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조선시대의 모든 질서를 비판하고 탈주자학을 선언했다. 그의 학문은 주자 제일주의에 대한 비판이며 실천유학으로 회귀였다. 귀양살이에서 풀려나기 직전 정약용은 <경세유표>를 지어 땅은 농사짓는 농민들의 땅임을 주장했다. 또한 고을 수령들의 선정을 위한 지침서를 적은 <목민심서>를 저술했다. 귀양에 풀린 다음에는 <흠흠신서>를 지어 고을 수령이나 관리가 재판을 할 때 억울한 백성이 없도록 알아두어야 할 것들을 기록했다

     

    정약용 묘소
    정약용의 명언

    실학자들이 활동했던 조선후기는 말기적 병폐를 드러내던 시기로, 대대적인 사회혁신이 필요했다. 무너져 내리는 사회질서를 바로 세우고자 했던 실학자들은 이를 위해 우리나라의 역사와 제도, 말과 풍속, 자연 등을 연구했다. 그러나 현실은 너무 높은 벽이었다. 개혁의지에도 불구하고 미약한 정치기반으로 인해 사회를 변화시키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이 시기 실학정신의 명맥을 잇지 못한 조선왕조는 구한말 열강들의 서세동점 앞에서 힘없이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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