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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복감에 당분의 욕구를 가져오는 혀의 앞쪽에서 느끼는 단맛에 대해서
    아들을 위한 인문학/맛의 세계 2023. 3. 23. 03:38

    혀의 가장 앞쪽에서 감지되는 단맛은 생명을 뒷받침하는 에너지원을 찾아내기 위한 미각이다. 인간의 에너지의 기본이 되는 당류가 단맛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단맛에 대한 인류의 욕구는 탐욕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하였고 인류는 자연 속에서 단맛을 끊임없이 추구해왔다. 단맛은 혀에 만족감을 줄뿐 아니라 신맛과 쓴맛을 마비시킨다. 단맛이 가진 기분 좋은 달콤함에 혀가 속고 마는 것이다. 19세기 이후에는 항상 똑같은 맛을 유지해야만 하는 가공식품과 청량음료가 대량생산되었는데 여기에도 미각을 모호하게 만들 목적으로 많은 양의 설탕 또는 인공 감미료가 혼입되었다. 다른 맛을 제거하는 단맛의 성질을 이용한 것이다. 한편 동맥 속 혈당치가 떨어지면 인간은 견딜 수 없는 공복감에 시달리고 당분을 섭취하고 싶다는 충동을 느낀다. 혈중 당도의 저하가 음식을 먹어야만 한다는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운동선수가 경기 후 당분을 찾거나 성장이 빠른 아이들이나 임신한 여성이 단 것을 매우 좋아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때문이라고 한다

     

    단맛을 대표하는 것은 당분을 응축시킨 설탕이다. 사탕수수를 짜서 바짝 졸이는 설탕은 세계사에서도 크게 활약한다. 식염으로 한정된 소금에 비해 단맛은 많은 식자재에 함유되어 있다. 그래서 소금은 권력에 의해 통제되었지만 단맛은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웠으며 다양한 맛으로서 상거래의 대상이 되었다. 사탕수수는 뉴기니, 벵골만, 인도, 아라비아해, 브라질 카리브해 등 다양한 곳에 옮겨 심어지며 대표적인 감미료가 되었다. 오늘날 사탕수수와 사탕무로 만들어지는 설탕의 연간 생산량은 15억톤 이상으로 쌀과 밀의 생산량보다 많다. 사탕수수의 원산지는 동남아시아의 뉴기니 섬이다. 그리고 기원전 2천년 사탕수수가 인도에 전해지면서 인도가 제 2차 원산지가 되었다. 사탕수수는 7세기에 인도에서 이슬람 세계로 전해졌으며 지중해 연안으로 재배가 확장되었다. 대항해 시대 이후에는 포르투갈이 브라질에서 영국인과 프랑스인이 카리브 해역에서 대량으로 사탕수수를 생산하면서 설탕은 세계적인 상품이 되었다

     

    설탕은 기원전 4세기에 그리스 세계에도 이미 알려져 있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기원전 336-323)이 인도에 원정군을 파견한 기원전 327, 당시 사령관이었던 네아체스 장군은 인더스강 유역에서 우연히 사탕수수를 발견하고 인도에서는 벌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갈대 줄기에서 꿀을 만들고 있다라고 보고하였다. 갈대줄기는 사탕수수, 꿀은 설탕을 가리킨다. 기원전 305년경에 시리아에는 인도의 찬드라굽타 왕조가 설탕을 전했는데 그들은 이것을 돌꿀이라고 소개했다. 6세기에 중국 북위에서 간행된 농가가 갖추어야 할 실용서 제민요술에도 감자(사탕수수)가 등장한다. 감자는 어느 땅에서도 생산되지만 베트남 북부에서 생산되는 감자가 특히 맛이 좋다고 하였다. 중국에서는 6세기에 이미 사탕수수를 짠 즙으로 설탕을 만드는 방법이 알려져 있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당시에는 딱딱한 설탕을 돌꿀이라 부르며 소금과 같은 광물로 취급했다 일본은 당나라의 승려를 통해서 전해졌고 식자재가 아닌 약재로 취급했다

     

    달콤함을 추구하는 인류의 활동은 수렵 채집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인류가 가장 선호하는 단맛은 어느 곳에나 존재하는 벌이라는 곤충이 부지런히 모은 꿀이었다. 세계에는 10만 종류에 이르는 벌이 살고 있다고 한다. 벌꿀 채취 역사는 매우 오래되었다. 1.7만년 전에 그려진 스페인 동부 알라니아 동굴의 벽화에는 벌집을 얻기 위해 사다리로 높은 벼랑을 오르는 인물과 그 주변을 빙빙 날아다니는 엄청난 꿀벌 떼가 그려져 있다 메소포타마아 문명에서 벌꿀은 죽은 후에 망자가 먹는 음식이라고 생각했다. 서민에게는 높은 산 정상의 꽃이었던 것이다. 이집트인은 약 기원전 3천년 전부터 점토로 관 모양의 벌통을 만들어 양봉을 시행했다. 하지만 벌꿀은 파라오의 신관이 독점하였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양봉의 신 아리스타이오스가 농민들에게 벌을 기르는 법을 가르쳐주었다고 전해진다. 제우스를 비롯한 그리스신들은 황홀한 정도로 달콤한 벌꿀 주 넥타르를 애음하였다고 한다. 황금빛 벌꿀을 신의 음식으로 여겼으며 벌꿀 채집을 종교적 행위로 간주하였다

     

    벌꿀의 성분

    로마 시대가 되면 양봉의 규모가 커지면서 벌꿀이 식탁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었다.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는 벌꿀을 하늘이 주는 이슬의 은총이라고 절찬하였다. 로마 대표하는 미식가인 아파키우스는 요리책 데 레 코퀴나리아 로마 요리에 대하여에 수록되어 있는 약 500개의 레시피 가운데 1/3170가지 레시피에서 벌꿀과 벌꿀 주를 활용하고 있다 <데 레 코퀴나리아>에서는 생선유리에 사용하는 50가지 소스, 동물이나 새 등 고기 요리에 사용하는 60가지 소스에 꿀을 첨가하고 있다. 벌꿀을 감미료로써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요리에 감칠 맛과 풍미를 깊게 하고 야생 생물이나 새의 냄새를 제거하는 데도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벌꿀은 성분은 70% 이상이 과당과 포도당이다. 단맛도 설탕보다 1.5배나 더 진하다 구약성서 사무엘서와 중국의 가장 오래된 약학서 신농본초경에는 벌꿀이 정신 불안이나 뇌전증의 발작을 가라앉힌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무화과
    로마건국 영웅들

    인류는 각 토지에서 나는 열매에서 단맛을 얻었다. 지중해 지역에서는 무화과가 대표적인 감미료였다 무화과는 아라비아 반도 남부의 예멘 지방을 원산지로 하는 독특한 식물이다. 무화과는 기원전 2천년 전경에 이미 이집트에서 재배되었다. 무화과 열매에 있는 수많은 씨앗을 지식의 상징으로 여겨 신관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무화과 열매를 먹으면 속계에서 성계로 이동한다고 믿었다. 지중해 항로를 개척한 페니키아인도 지중해를 횡단하는 항해의 휴대식량으로 말린 무화과를 활용하였다 고대 로마도 무화과와 깊은 관계가 있다. 이리의 젖을 먹으며 자란 것으로 유명한 로마 건국의 전설적인 영웅 로물루스와 레무스 형제는 무화과나무의 그늘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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