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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의 대표 한옥마을인 북촌과 익선동을 찾아가 보면
    아들을 위한 인문학/국내여행 2022. 11. 26. 03:23

    한옥마을로 유명한 북촌은 종로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다. 행정구역에도 없는 북촌은 조선시대 한양도성의 중심부에 위치한 청계천과 종로를 중심으로 위쪽을 북쪽, 그 아래쪽을 남촌이라고 했다. 북촌은 궁궐과 가까웠기 때문에 권력과 부를 가진 양반들이 모여 살았다. 하지만 지금의 북촌은 과거범위에서 축소되어 경북궁과 창덕궁 사이의 지역을 말한다. 이 북촌은 1930년 일제강점기때 만들어져 근대한옥 또는 도시형 한옥이라 불렀다. 그 당시 서울인구가 급증하자 주택난이 심해지자 부동산 개발회사들은 큰 대지의 한옥을 매입한 후 땅을 분할하여 여러채의 소규모 한옥을 지어 도시형 한옥마을을 만들어 유사한 공간 구조가 생겼다. 도시형 한옥은 전통한옥을 개량하여 수도와 전기가 들어오게 하고 대청에는 유리문을 설치했으며 바닥에는 타일를 깔았다. 이때 정세권이 건양사라는 부동산 개발 회사를 설립해 북촌을 비롯해 익선동, 혜화동, 성북동 등 현재 남아 있는 한옥마을단지를 만든 장본인이다. 공간적 항일운동을 했다고 평가받기도 한다

     

    일제 강점기에는 남촌의 힘없는 양반들을 몰아내고 그곳에 일본인이 많이 살았는데 청계천 남쪽의 명동과 충무로 등이 우선적으로 개발되었다. 해방 이후에는 한강 남쪽으로 개발의 중심이 이동하여 한강 북쪽의 북촌은 큰 변화를 겪지 않고 1930년대 조성된 한옥의 모습 그대로 유지되었다. 한옥이 몰려있는 가회동 골목길은 카페, 갤러리 등으로 용도가 변경되기도 하였다. 또한 서울시가 소유한 서울 공공한옥은 박물관, 공방, 체험관, 게스트하우스 등으로 활용하고 있다. 계동길에는 배렴 가옥, 마을서재,가 있고 한지인형, 전통염색의 체험하는 공방도 있다. 과거 북촌은 왕실이나 양반가에서 사용하는 고급 공예품을 제작하던 수공업자인 경공장이 모여 있던 곳이었다. 한옥마을 주변에도 국악당에 이어 민요박물관과 한복체험관이 들어섰다

     

    북촌은 하천을 중심으로 동네가 형성된 지역이다. 과거 북촌에는 북쪽의 산에서 청계천으로 흐르는 물길이 남북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1930년대 이후 북촌의 물길을 복개하여 도로로 만들었다. 북촌의 주요도로인 삼청동길, 가회동길, 계동길, 원서동길 등이 모두 과거 하천이었던 곳이다. 도로는 남북 방향의 하천흐름을 그대로 따르며 완만한 곡선형태를 보이고 있다. 경북궁과 창덕궁을 지나 동대문에 이르는 큰 길(율곡로)1932년 작은길을 확장하여 만들었다. 특히 창덕궁 앞 구간은 담장으로 연결되어 있던 창덕궁(창경궁)과 종묘를 분리하여 도로를 만든 것이다. 풍수지리상 북한산의 주맥이 창덕궁에서 종묘로 흐르는데 이것을 끊어 민족혼을 말살시키려고 조선총독부가 도로를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올해 문화재청은 창덕궁과 종묘를 다시 연결하는 공사를 완공했다

     

    1884년 박규수, 김옥균, 서재필, 홍영식 등 젊은 개화파들이 새로운 세상을 도모하려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3일 천하로 끝난 이 사건의 주역들은 세도가 출신으로 북촌에 모여 살고 있다. 갑신정변 실패 이후 이들은 역적으로 몰려 집을 몰수당했고 그터에 학교가 지어졌다. 그래서 북촌에는 유난히 많은 학교가 있다. 김옥균, 서재필이 살던 곳에 관립 한성중학교(경기고)가 세워졌으며 박규수와 홍영식의 집에 있던 곳에 한국 최초의 현대식 병원인 광혜원을 거쳐 경기여고가 위치했다. 1970년대까지 소위 명문고라고 불렀던 고등학교들은 강북, 그것도 대부분 북촌 한옥마을이 위치한 종로구에 있었다. 그러던 것이 1970년대 이후 강남개발이 이루어지면서 경기고는 1976년 강남구 삼성동으로 이전하고 그 자리는 정독도서관이 세워졌다. 1978년 강남구 대치동으로 이전한 휘문고에는 현대그불 계동사옥이 위치하고 경기여고와 창덕여고가 떠난 자리는 1993년 이후 헌법재판소로 바뀌었다

     

    익선동 한옥마을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한옥마을은 익선동으로 북촌 한옥마을과 그리 멀지 않는 종로 3가와 창덕궁 사이에 위치한 곳이다. 익선동 한옥마을은 1920년대 만들어진 도시형 한옥 주거단지다. 익선동에는 한옥마을 이전에 누동궁이 위치하고 있었다. 누동궁은 조선 25대 왕 철종이 출생해서 14세까지 자랐던 곳이다. 19세에 왕이 된 후 익선동 집터에 아버지인 전계대원군의 사당을 지어 제사를 모시게 했다. 철종의 형인 영평군이 소유했던 누동궁을 그 후손이 정세권의 부동산 개발회사인 건양사에 팔면서 현재의 익선동 한옥단지가 만들어졌다. 다만 익선동은 북촌보다 좀 더 작은 규모의 한옥으로 구성되었고 골목도 좁게 만들어졌다. 또한 피맛길 하면 종로 안쪽 골목길을 많이 떠올리지만 익선동에도 피맛길이 있었다. 피맛길은 말을 피하는 길이라는 뜻이다. 조선시대 말을 타고 다니던 양반들을 마주할 때마다 인사를 해야 하는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 사람들이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길이다

     

    익선동 한옥마을 옆쪽에는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된 낙원악기상가가 있다. 1층이 도로로 사용되는 특이한 건물이다 이 건물은 필로티 공법으로 만들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고급 주상복합아파트라고 볼 수 있다. 현재 지하 1층은 재래시장, 2,3,4층은 세계에서 규모가 가장 크다고 평가받은 악기상가, 4층 일부는 실버극장과 옥상마당, 6-15층은 아파트로 사용되고 있다. 한편 낙원빌딩이 있던 곳은 일제강점기 때 소개지였다. 소개지는 전쟁으로 도시 전체가 불타는 걸 대비하기 위해 도시 곳곳에 비워둔 땅을 말한다. 해방 이후 자생적으로 무허가 주택과 재래시장이 들어섰다. 1967년 김현옥 서울시장은 낙원동 일대를 철거하여 정리하고 3.1대로와 현대식 상가 건물을 지었다. 1919년 만세운동이 있었던 탑골공원과 태화관 등이 이 도로 주변인 것을 기념해 1966년 삼일로라고 지었다. 낙원빌등은 1960년대 종로 일대는 문화중심지로 악기수요가 많았다 그래서 악기 상점이 많이 들어섰다 그러다가 1990년대 유흥업소 단속, 노래방 기계의 보급으로 악사 인력시장의 기능은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1969년 낙원상가 4층 한쪽에 문을 연 허리우드극장은 단성사, 피카디리극장과 함께 종로 극장가를 대표했다. 그러나 1990년대 대형 복합 상영관이 생겨 위기를 겪었다

     

    서울 교동초

    서울 도심 한복판 종로구 교동초등학교는 1894년 개교한 국내 최초의 근대식 초등학교로 1970년대에는 5천명이 넘는 학생들로 2부제로 수업을 진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2019년 재학생 총원이 174명으로 줄어들었다. 이는 1980년대 후반 도심개발로 인해 상업, 업무시설이 늘어나면서 주거지가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주민센터도 통합하여 1,2,3,4가 함꼐 운영되고 있다. 최근 북촌 한옥마을이 우리나라뿐 아니라 외국인들에게 즐겨 찾는 관광지가 되었다. 계동길에 위치한 중앙고는 드라마 겨울연가와 도깨비의 촬영장소로 유명하다 중앙고는 3.1운동과 6.10만세운동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북촌 한옥마을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북촌 8경 중 가장 많은 사람이 방문하는 북촌 5경과 6경 가회동 경사진 골목길이 있다. 골목길 가운데 서서 위를 올려다보면 곡선의 한옥 처마선이 하늘과 맞닿아 있고, 아래를 내려다보면 남산과 한옥이 어우러진 멋진 장면을 볼 수 있다. 한편 북촌이나 익선동처럼 유명 관광지에는 교통체증, 환경오염 등 오버투어리즘이 발생하는 문제점이 있어 상대를 배려하는 아름다운 여행자가 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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