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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한강을 품고 있는 막내 도시인 여주를 찾아가 보면
    아들을 위한 인문학/국내여행 2022. 11. 12. 04:00

    요즘 한강에 떠 있는 배들은 대부분 유람선이다 하지만 조선시대에는 한강을 통해 여러 물건을 실어나르는 배들이 무척 많았는데 국토의 70%가 산지인 우리나라의 지형 특성상 도로를 내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하천을 이용해 물자를 수송했다. 당시 한강의 4대 나루 중 두 개가 여주에 있었다. 조선시대의 여주는 수운으로 번성한 곳이었다. 임금님꼐 진상하던 쌀로 알려진 여주와 이천 지역의 평야에서 생산된 기름진 쌀과 남한강에서 잡힌 다양한 어류들, 그리고 강원도와 충청도에서 온 배들이 서로 모여 시장에 크게 열리던 지역이었다. 강원도 영월, 정선 등에서 온 뗏목은 목재를 가득 싣고 와 떼돈을 번다라는 말의 유래가 되었을 정도로 번성했다. 서해안에서부터 소금이나 새우젓을 싣고 온 배들은 이를 식량과 바꾸어갔다 또 마포와 충청도 사이에서 사람들을 싣고 다니는 황포돛배까지 장날이면 많은 사람들과 배들이 한데 모여 시끌거렸다.

     

    역참제
    마패

    수운은 사람들의 생활에서 뗴어놓을 수 없을 만큼 중요했고 국가의 조세징수에서도 큰 역할을 했지만 우니라나의 기후는 수운에 유리한 조건이 아니었다. 강수량의 대부분이 여름에 집중되는 특성상 사계절 내내 안정적으로 수운을 이용하기가 무척 어려웠기 때문이다. 반면 도로나 철도교통은 날씨의 영향을 상대적으로 적게 받으니 하천이 담당하던 교통의 기능을 대체하기에 충분했다. 조선초기부터 도로 교통 체계인 역참제가 시행되었다. 여주에도 세 개의 역과 여덟 개의 원이 설치되었다 그래도 18세기까지는 상업의 활성화에 힘입어 남한강의 수운이 주요 교통수단으로 굳건하게 가능했지만 19세기 후반부터 등장한 철도에 결국 그 명성을 내어주게 되었다. 경인선, 경부선, 호남선, 중앙선 등의 철도가 물류 수송을 담당하게 되었다. 한편 100년전에는 여주에 총 세 개의 5일장이 있었는데 산업화와 도시화로 여주 5일장만 명맥을 이어가고 경기도에서 2번째로 큰 시장이다

     

    신륵사
    신륵사 다층전탑

    고달사지에 들어간 순간 황량한 절터에 석조 건축물만 있다. 고달사가 창건된 것은 신라 경덕왕 764년라고 하는데 고려시대에 규모가 확대되었고 조선초기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고달사에 대한 기록이 나오고 있다 고달사지는 매끈하게 다듬어진 석조(승려들이 물을 담아두거나 곡물을 씻던 곳) 섬세한 연꽃잎 등 고려시대의 예술솜씨가 엿보이는 석조대좌와 통일신라 후기의 탑비 형식을 잘 보여주는 원종대사 탑비 등의 석조건축물이 있다 한편 천년고찰인 신륵사는 신라시대에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하는데 7일 동안 기도를 올리자 아홉 마리의 용이 연못에서 나와 승천한 뒤에 절에 지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설화의 내용이다. 신륵사는 강 바로 앞에 위치해 있지만 평탄한 지형이 아니다. 이절은 여주의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할 수 있다. 특히 이곳에서는 매년 세종대왕문화제와 오곡나루 축제가 열리는 장이다. 황포돛배를 탈 수도 있다. 신륵사에는 다층전탑이 유명한데 보통 석탑은 화강암으로 만드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다층전탑으로 흙으로 만들어진 올린 고려시대에 유일하게 남은 전탑이다.

     

    여주보

    보는 농사가 주된 산업이었던 과거 우리나라에서는 꼭 필요한 수리시설이었다. 강수량의 대부분이 여름에 집중되는 기후이니 비가 적게 내리는 계절에는 하천에 물이 줄어들 수 밖에 없다. 그래서 하천 유로의 일부에 얕은 둑을 쌓아 농사에 필요한 최소한의 물이 고이도록 만든 시설이 바로 보이다. 전통보는 나무와 흙 등 자연에서 온 재료로 만들었기 때문에 물의 순환을 가로막지 않았다. 또 완전히 고정하는 방식이 아닌 까닭에 매년 홍수 때면 파손되었고 하천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막지 않았다. 그러나 2008년 정부에서 4대강 사업을 추진하면서부터 수질개선, 가뭄과 홍수 예방을 위해 수십조원을 들여 4대강과 섬진강들의 지류에 보, 저수지, 댐을 설치하는 사업을 했다. 1970년대 제 1차 국토종합개발계획의 일환으로 4대강유역종합개발이 실시되었다. 이때 하천 곳곳에 다목적댐과 관개시설이 건설되었다. 그 결과 농업, 공업, 생활에 필요한 물을 원활하게 공급받을 수 있게 되었지만 수질이 악화되고 생태계가 파괴되는 등 장기간에 걸쳐 해결해 나가야 할 문제가 많았다

     

    우리나라에서는 여름철이면 습윤한 기단의 영향으로 강수량이 많아지는데 여기에 장마와 태풍까지 겹치면 집중호우가 내린다. 그래서 매년 하천이 범람하게 되고 하천에서 가까운 곳에는 상대적으로 입자가 큰 물질들이 쌓인다. 이런 일이 매년 반복되면 주변보다 약간 고도가 높은 자연제방이 만들어진다. 반면 그 자연제방 뒤쪽으로는 상대적으로 입자가 작은 물질들이 쌓인다. 퇴적물의 입자가 작으면 물이 빠지기 곤란하기 때문에 습지가 형성되곤 하는데 이를 배후습지라 한다. 배후습지의 퇴적물에는 하천이 상류에서부터 끌고 온 다양한 영양물질이 많이 포함되어 있어 땅을 비옥하게 만든다. 이렇듯 물이 잘 빠지지 않게 하는 배후습지 퇴적물의 특성과 비옥한 토양은 벼농사에 유리한 환경을 제공한다. 또 남한강의 풍부한 유량을 농업용수로 이용할 수 있다는 장점과 더불어 산지로 둘러싸인 낮과 밤의 일교차가 큰 환경 덕분에 좋은 품질의 쌀이 생산될 수 있었던 것이다. 지력을 보호할 수 있는 겨울에 보리를 심는 이모작이 할 수 없어 좋은 쌀을 생산할 수 있다. 겨울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 땅이 얼어버리는 중부지방의 특성 때문이다

     

    여주에서 꼭 먹어야 하는 음식은 쌀밥정식이다. 다른 지역은 반찬이나 요리가 주가 되지만 여주에서는 기름진 쌀을 가마솥과 장작불을 이용해 갓 지어낸 밥이 주가 된다. 밥 자체의 향과 맛을 오롯이 느낄 수 있다. 여주는 그밖에도 고구마는 유명한데 국내 생산량의 20%를 차지한다. 사실 여주에서 고구마는 땅콩의 대체 작물로 등장했다. 남한강 주변의 평야 중에서도 하천의 자연제방과 같이 입자가 큰 모래질의 토양이 퇴적된 지역은 물이 잘 빠져서 벼와 같은 작물을 재배하기는 어려웠다. 땅콩은 이런 모래질 토양에서도 잘 자라는 특성 때문에 많은 농가에서 재배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점차 값싼 수입산 땅콩이 시장을 점유하게 되면서 가격 경쟁력을 잃은 땅콩 대신 고구마를 키우기 시작한 것이다. 고구마가 유명한 이유는 오랜시간 반복된 남한강의 범람으로 형성된 자연제방의 모래질 토양과 고구마는 최고의 궁합이었던 것이다 흙이 좋고 수도권의 배후시장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여주에는 다양한 농업이 이루어지고 있었으므로 시로 승격할 때 반대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도시가 되어버리면 농어촌 지역에 주어지는 많은 혜택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도시화율은 90%이상으로 세계적으로 높은 수준이다. 그러나 막상 시지역에 가보면 도시의 경관을 찾아보기 어려워 혼란스럽게 느껴진다. 실상은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고 경관도 농어촌의 모습인 지역들마저 행정구역상 시로 묶여버렸기 떄문이다 급격한 도시화를 겪으면서 우리나라에서는 군의 중심지에 인구가 5만명 이상 밀집하면 분리해 시로 승격시켰다. 그러다 보니 군 지역 생활권의 중심지가 갑자기 다른 행정구역으로 분리되어 버려 많은 불편을 야기한 것은 물론 개발의 격차로 인한 갈등을 초래하게 되었다. 이를 해결하고자 1995년부터 시와 군의 생활권이 같거나 동질성이 높은 지역들을 묶어 도농통합시로 지정하기도 했다. 여주시는 세수확보와 지역 이미지 개선을 위해 오래전부터 시승격을 추진하였다. 여주군과 여주읍 인구가 11만이라 주민의 반대를 무릎쓰고 2013년에 최근에 도시가 되었다

     

    여주시는 다양한 축제들은 주민들은 화합과 여주시 발전의 토대가 되었다. 여주시는 사시사철 열리는 축제이다. 매년 봄이면 남한강변의 벚꽃축제가 시작되고 5월 초순에는 도자기축제가 열리고 5월말에는 참외축제 그리고 10월이면 세종대왕문화제와 오곡나루 축제가 개최된다. 11월에는 명성왕후 탄신일에 맞춰 명성왕후승모제로 열린다. 그중에서 도자기 축제는 30년간 개최한 성공적인 지역축제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도 여주의 도자기에 대한 언급이 있다. 배후습지의 미립질 퇴적층과 싸리산을 중심으로 고령토 및 도자기의 원료를 채취할 수 있다. 또 명성왕후를 비롯해 무려 9명의 왕비가 나온 지역이다 한글날 전후에 개최되는 세종대왕문화제에는 책과 인문을 주제로 한다. 한편 여주는 세종대왕릉이 있어서 여주시민들에게는 대단한 자부심을 준다. 그밖에 한지, 단청, 호패, 풍경, 장승만들기 등 다양한 우리 전통문화를 체험할 수 있다. 오곡나루 축제는 대형 가마솥에 여주쌀밥과 오곡비빔밥 먹기 체험을 비롯해 여주 군고구마 시식까지 있다. 신륵사에서는 조선시대 관복을 입은 임금과 중전 및 신하들의 행렬이 있다.

     

    세종대왕 영릉

    여주에는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 있다. 조선의 4대 왕이자 한글창제로 유명한 세종대왕의 능과 조선의 17대 왕이자 대동법을 실시한 효종대왕의 능이다. 풍수지리를 비롯한 당시의 세계관, 종교관, 자연관 등 독특한 장묘 문화와 예술적인 독창성까지 갖춘 점, 현재까지도 제례의 전통이 이어지고 있는 점 등을 높이 평가받은 덕분이다. 세종대왕릉은 원래 광주 헌릉에 있다가 풍수지리상 명당에 해당한다고 예종 1469년에 여주로 이장했다. 지금의 능침 자리가 하늘의 신선이 하강할 만큼 좋은 자세를 갖추고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원래는 여흥군이었는데 왕의 무덤이 있는 곳이기에 주변의 다른 현과 합쳐 여주로 승격한 것이다 두 능침은 모두 한글로 영릉으로 부른다. 둘다 왕과 왕비를 합장한 무덤이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그 형식은 매우 다르다. 세종대왕과 소현왕후의 능은 하나의 봉분에 두 개의 방을 합장한 형태고 효종대왕과 인선왕후는 위아래로 봉분이 배치된 독특한 방식이다 이 또한 풍수지리사상에서 도입되었다고 할 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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