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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완전한 독립국가의 건설을 위해 좌우합작의 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했는데
    아들을 위한 인문학/한국사 2021. 11. 8. 05:20

    조선건국동맹(1944년)

    태평양전쟁이 막바지로 치달으면서 일본 제국주의에 패망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우기 시작했다.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의 반격이 드세지는데다가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됨으로써 일본은 전의를 상실하고 말았다. 일본의 무조건 항복의 한반도에의 꿈에 그리던 해방이 찾아왔다. 한국의 일부 지도층들은 이전부터 일본의 연이은 패전으로 해방이 멀지 않았다는 것을 예감하고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여운형이다. 그는 1944년 일본의 패배를 확신하면서 건국동맹을 결성하고 해방 이후를 준비했다 그리고 불문, 불신, 불명의 3대 철칙과 한국의 완전한 자유독립, 반동세력 배제, 민주주의 원칙에 입각한 건설을 골자로 한 조선건국동맹을 비밀리에 조직했다

     

    조선총독부 행정권을 여운형에 이양
    휘문중 건준위 발족(1945.8.15)

    815일 일본의 패망이 알려지던 날 아침,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엔도는 여운형에게 재한 일본인의 안전과 재산보호를 요청하면서 행정권을 이양했다. 엔도로부터 행정권을 이양받은 여운형은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건준 위원장에 추대된 여운형은 해방 다음 날 서울 휘문중학교에 모인 5천여 군중들 앞에서 해방의 벅찬 감격과 건준의 결성 소식을 알리고 국가재건을 부르짖었다. 건준은 건국동맹을 모체로 하여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가 균형을 이루는 좌우연합적인 조직을 구성하고자 했다. 이로써 우익의 안재홍을 부위원장으로 하여 조직을 갖추었다. 건준조직은 지방에서도 활발히 진행되었는데 831일까지 145개의 지방조직이 건설되었다. 도 단위에는 거의 다 건준지부가 있었고 심지어 면단위까지 조직된 곳도 많았다. 건준은 국가재건의 산파역할을 자임하면서 825일 건준 강령을 발표했다

     

    1. 우리는 완전한 독립국가의 건설을 기함

    2. 우리는 전민족의 정치적, 사회적 기본요구를 실천할 수 있는 민주주의 정권 수립을 기함

    3. 우리는 임시적 과도기에 있는 국내질서를 자주적으로 유지하여 대중생활의 확보를 기함

     

    점차 기구가 확대되면서 건준은 내분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1차 조직 때의 연합전선에서 벗어나 점차 좌익세력이 주도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안재홍 등 우익세력들이 건준을 탈퇴했다

     

    미군정

    미군이 서울에 입성하기 이틀 전 진주할 미국에게 조선민족의 자치능력을 표시할 당면의 필요에 의해서 건준을 해체하고 조선인민공화국의 수립되었다. 이로써 건준은 출범한 지 불과 20여일만에 해체되고 명실상부한 건국준비는 손도 대지 못했다. 여운형은 미군정이 들어서기 전에 인민공화국을 수립하고 하나의 정부로 인정받으려 했다. 과거 조선총독부의 지위와 체제를 그대로 물려받은 미군정은 친일계인 김성수, 송진우, 김동원 등 우익계 인사들을 기용하여 인민공화국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인민공화국은 그 자체가 선택한 명칭 여하를 불문하고 어떤 의미에서든 정부가 아니므로 그러한 직능을 집행할 하등의 권리가 없다. 따라서 어떤 정당이든지 정부로 행세해보려는 행동이 있으면 이것을 불법적 행동으로 취급한다고 했다

     

    이즈음 여운형도 근로인민당을 결성하기 위해 사임했다. 곧바로 1946년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려 임정수립 문제가 다루어지면서 인민공화국의 존재는 이름뿐인 것이 되고 말았다. 또한 북측은 조선인민공화국을 수립함으로써 서울의 인민공화국을 부정한 상태였다. 이로써 해방 이후 민족의 자발적인 건국조직이었던 건준위와 인민공화국은 미군정의 대두와 함께 해체되었다. 우리 손으로 건국을 이루어보려던 의지는 물거품이 되고 좌우 대립만이 극단으로 달릴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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