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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8년 단일선거는 국토 양분의 민족적 비극이라며 북으로 행했던 남북협상은 어떻게 진행되었나
    아들을 위한 인문학/한국사 2021. 10. 26. 05:27

    좌우합작운동(여운형과 김규식)

    해방이후 국민의 열방은 바로 단일 민족국가를 건설하는 일이었다. 이 단일국가운동은 대체로 3단계로 진행되었는데 제1단계는 임정세력이 귀국하기 직전 국내에 남아 있었던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를 중심으로 한 정부수립운동이다. 2단계는 김규식과 여운형 중심의 좌우합작 운동으로 중도통일세력 집결하에 합작 7원칙까지 합의했으나 극좌와 극우의 반대와 미소 냉전체제로 인해 진전을 보지 못한 채 좌절되었다. 3단계는 단일선거 및 단독정부수립에 반대하고 통일정부를 수립하려는 김구와 김규식의 남북협상운동이었다

     

    1947년 남조선 과도정부

    김구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주권행사를 계속 유지시키는 맥락에서 반탁운동의 고삐를 더욱 죄어나갔다. 이 방법이 통일의 전망을 밝게 하는 방법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이에 비해 이승만은 정치권력의 장악이라는 현실문제에 집착하여 단선과 단정을 실현하고자 했다. 1946년 이승만은 내외 여론을 무시한 채 남한만이라도 독자정부를 수립할 것을 다시 주장했다. 게다가 통일정부 수립이라는 민족적인 열망을 저버린 이승만에 이어 미군청정도 1947년에 사실상의 남조선과도정부를 출범시켰다

     

    1947년 10월 미소 공동위워회 회의 결렬
    유엔 남조선단독정부 승인 가결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어 한반도 문제가 유엔으로 넘어가자 유엔총회는 유엔한국위원회 설치안, 한국총선거안, 그리고 단독정부수립 후 유엔철수안을 가결함과 동시에 선거비용으로 53만달러를 지급키로 결정했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에 위기감을 가진 김구는 남한만의 단일선거는 국토 양분의 민족적 비극을 초래할 뿐, 민족의 숙원인 통일에의 접근은 불가능한 것이라며 엄중 경고했다

     

    1947년 7월 여운형 암살

    1947년이 저물어갈 무렵 민족지도자의 여운형과 장덕수 등이 암살되고, 조소앙은 정계은퇴 성명을 발표하는 등 정국에는 불안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19481월 이승만이 유엔에 의한 남한단선 결정을 강조하던 날, 미소 양군이 철수한 후 자율적인 남북협상을 통한 총선거만이 속히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는 김구의 성명서가 발표되었다. 김구에게 있어 완전한 독립은 통일독립이었다. 다음날 김규식도 담화를 발표하여 남북요인회담을 남한에서 갖자고 제안했다. 이로써 임정의 동지 김구와 김규식은 손을 잡고 남한만의 단선을 반대하고 유엔한국위원회에 남북협상방안을 제시하면서 협조를 구했다. 이를 배경으로 김구는 19482월에 3천만 동포에게 읍고한다라는 남한단정수립 반대의 뜻을 담은 간곡한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1948년 2월 김구는 3천만 동포에게 읍고한다
    1948년 4월 남북정당사회단체 합동 회의

    드디어 김구와 김규식은 북한의 김두봉과 김일성에게 남북정치회담을 정식으로 제의하는 서신을 발송했다. 이러는 사이 이승만은 그 특유의 야심으로 5.10총선 실시를 선포했다. 김구는 즉각 5.10선거 불참할 것임을 밝혔다. 남북정치회담 제의에 대해 북측은 마침내 수락의사를 알려졌다. 이에 김일성은 양김을 무조건 영접하겠다고 전달해서 김일성의 의사를 전달받은 김구는 북행을 결심했으나 김규식은 측근의 만류와 하지 중장의 북행 중지요청으로 갈등을 겪었다. 난항을 겪고 있을 무렵, 108명의 문화인들이 남북협상을 지지하고 북행을 통일의 신호라 하는 지지의사 발표하자 김규식은 마침내 북행을 결심했다.19484월 김구는 북행을 반대하는 우익의 결렬한 반대시위를 피해 북행길에 올랐다. 20일에는 한독당의 조완구, 조소앙이 21일에는 김규식과 민련대표 일행이 평양에 도착했다. 남북정당사회단체 대표자 합동회의는 419일부터 26일까지 8일간 계속되었다. 대표자는 545명 참석한 가운데 모란봉 극장에서 역사적인 남북회담이 열렸다. 김일성의 개회사와 김두봉와 허헌의 단선과 단정의 반대의 통일국가 건설을 위한 축사의 순서로 이어졌다. 그러나 회담의 내용이나 진행은 남측이 계획한 남북고위정치협상과 거리가 멀었다. 김구와 조소앙 등은 이에 격분하여 본회의장에는 참석하지도 않았다.1948427일부터 30일 사이에 남북조선정당사회단체 지도자협의회라는 명목으로 남북요인 정치회담이 열렸다. 남측의 대표로 김구, 김규식, 조소앙, 홍명희 등이 참석했고, 김일성, 김두봉, 박헌영,허헌, 백남운 등이 북측대표로 참석했다.

     

    1948년 5월 남한 단독 총선거
    1948년 8월 15일 남한단독정부 수립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 수립

    55일 서울로 돌아와 김구와 김규식은 평양에서의 남북협상 경위와 협의 사항을 설명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하고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남한의 5.10선거를 거부했다. 그러나 그들은 단독선거를 저지할 만한 힘을 갖도 있지 않았다. 남북협상파의 통일운동에도 불구하고 510일 남한만의 단일선거가 치러졌다. 이후 남한은 815일에 정부를 수립하고 북한은 9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됨으로써 2년뒤의 내전을 예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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