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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스크바 3상 회의 신탁통치에 미소 강대국의 이념논리로 전개돼 분단까지
    아들을 위한 인문학/한국사 2021. 10. 31. 03:38

    해방후 미국과 소련은 38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분할점령하고 각기 군정을 실시했다. 따라서 자주적인 통일국가 건설은 늦춰지고 있었다. 미국은 자본주의 국가건설을 꾀하는 정치세력을 지원함으로써 한반도에서 자신의 입지를 굳히고자 했다. 그래서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가 급히 선포한 조선인민공화국은 물론 중경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등 한국인이 자주적으로 만든 그 어떤 기구도 주권기관으로 인정하지 않고 바로 군정을 실시했다. 미군은 군정을 이끌기 위해 친일경력이 있는 자본가, 지주 출신의 인사들이 군정의 행정고문이나 고위관료로 임명되었다. 반면 북한을 점령한 소련은 행정권을 각 도 인민위원회에 넘겨주고 민정부를 설치하고 영향력을 행사했다. 해방 직후 미소 분할점령은 민족분단이라는 위험을 예고했다. 이러한 상태에서 19451227일 밤 느닷없이 민족분단을 예고하는 연합군의 신탁통치 결정이라는 모스크바 3상회의의 내용이 전해졌다

     

    테헤란 회담

    한반도에 관한 신탁통치 문제가 국제간에 처음 제기된 것은 1943년 영국수상 이든과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와의 회담석상에서였다. 그런데 이보다 앞서 루즈벨트는 테헤란 회담(1943.11)에서 소련의 스탈린에게 한국의 신탁통치방안을 제안하여 찬성을 받아낸 상태였다. 이 회담에서 루즈벨트는 한국의 정치미숙을 들어 신탁통치 기간이 약 30년이 필요한 것이라고 제안했다. 이에 대해 스탈린은 짧으면 짧을수록 좋다고 응수하여 구두로라마 신탁통치안을 합의했다. 그후 신탁통치안은 19452월 얄타회담에서 비공식적으로 승인되었으며 모스크바 3상회의를 통해 공식적으로 발표되었던 것이다. 신탁통치안은 이와 같이 미국의 구상으로 이루어졌다. 소련이 대일전쟁에 참전하는 등 남진정책을 표방하자 소련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한 미국의 복안이었던 것이다. 신탁통치라는 지배정책은 2차대전 후 자기나라에 유리한 경제적,정치적 영향력을 적당히 발휘하려고 하는 신식민지 통치방식이었다. 이는 제국주의의 구체적인 행동 방식이었다. 이러한 강대국들의 의도 속에서 신탁통치에 대한 구체적인 합의를 위해 모스크바 3상 회의가 열린 것이다. 이회의에서 미국의 국무장관 번즈는 한국인의 참여가 제한된 통일시정기구를 조직하여미영중소 4개국의 대표로 구성되는 집행위원회에서 권한을 수행할 것과 탁치의 기간은 5년을 넘지 않을 것 등의 조정된 탁치안을 내놓았다. 이에 대해 소련은 4개항 수정안을 제출했는데 그 내용은 한국의 독립은 부여하기 위한 임시정부 수립과 그것의 전제로서 미소공위의 설치 등이었다

    신탁통치 이슈로 민족분열

    동아일보 19451227일자에 실린 소련 신탁통치 주장, 소련의 구실은 38선 분할 점령,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로 반소 반공의 분위기가 높아졌다. 그러나 모스크바 3상 회의의 결정이 전해지자마자 미소 양군의 분할 점령을 극복하고, 남북전체를 포괄하는 임시정부를 수립하여 독립시킨다는 문제보다 5년간 신탁통치를 받아야 한다는 점이 강조되어 반탁운동이 크게 일어나게 되었다. 뒤늦게 삼상회의 내용이 알려지면서 공산당과 인민당 등은 삼상회의 지지 입장을 하였고 임시정부 우파와 이승만, 최대의 우파 세력인 한민당은 반탁을 계속 하게 된다. 한민당은 미군정에서 여당의 위치를 확보할 수 있었지만 친일 경력자가 많아서 명분상 취약할 뿐 아니라 신탁통치를 위해 남북통일 임시정부를 수립하기 전에 먼저 친일파 숙청부터 할 경우 크게 타격을 받을 상황이었다. 이점에서 한민당은 국내에 정치적 기반이 거의 없고 남북의 좌익세력과 함께 단일 임시정부를 수립할 경우 정치적 주도권을 확보하기 쉽지 않을 임정 우파세력 및 이승만과 이해관계를 같이 했고, 때문에 임시정부 우파세력 및 이승만과 한민당이 연합한 비교적 광범위한 반신탁통치 전선이 형성될 수 있었다

    이상에 살펴본 바의 의하면 남북 분단의 원인은 미국과 소련의 강대국과 같은 정치경제적 이념국가 건설로 자기 입지를 강화하려고 하는 의도와 거기에 대응하여 기생하려는 한국 정파들의 결합이 낳은 합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강대국의 이념전쟁이 더 강해서 그들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은 소련의 남진을 막기 위해 신탁통치를 테헤란 회담에서 루즈벨트가 제안하여 신식민제도를 도입하려고 했으나 막상 신탁통치를 실시하려고 보니 미국의 의도대로 될 것 같지가 않아 남한만으로 분단정부를 세우고자 하였고, 소련은 신탁통치 안에 일제청산을 하는 과정에서 자기 의도대로 공산주의가 한반도에 뿌리 내릴 것으로 보고 있었다. 그래서 미소공동위원회 2차 회의가 결렬되었다고 보고 있다. 그 전에 한민당 계열의 친일파인 김성수가 동아일보에서 선수를 쳐서 신탁통치에 대한 강대국의 색깔 논쟁을 불러 일으키어 소련은 조선의 독립을 반대하는 것처럼 오보하여 민족적 분열을 야기했다. 결론적으로 남북분단은 지금도 계속되는 이념대립이지만 그당시 미소간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대립과 민족내에서 친일과 경제적 기득권간의 내부 다툼으로 파생하였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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