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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제강점기에 경기도 편입된 한양이 어떻게 변하게 되었는가 ?
    아들을 위한 인문학/한국사 2021. 9. 15. 05:44

    태평로 거리

     

    우선 한성부가 경기도에 편입되고 경성으로 명칭이 달라졌다. 일제는 동경이외는 다른 수도를 인정할 수 없다는 명목으로 한양을 경기도의 하위 행정구역으로 격하시켜 조선왕조의 위상을 약화시키려 했다. 조선왕조의 상징인 한양도성과 궁궐도 훼손하고 파괴되었다. 조선왕조가 힘을 잃자 북촌의 양반들도 가세가 기울게 되어 집안 물건들을 하나둘씩 가까운 인사동에 팔게 되어 골동품 판매상이 자리잡게 되었다. 일제는 황토현을 없애버리고 일본 사신이 머물던 동평관 방면으로 길을 내어 태평로라는 이름을 지었다. 이길이 남대문까지 연결되고 굳건히 버텼던 성곽 중 남대문 양쪽 성곽은 헤이그 밀사 사건이 빌미가 되어 철거되었다

     

    일제 경성부 청사
    일제 조선 신궁

     

    일제 조선 신궁 입구

    도성이 철거되면서 종각도 유명무실하게 되어 더 이상 종을 쳐서 성문을 열고 닫으라고 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조선시대까지 보신각은 단층건물이었는데 해방이후 복원과정에서 2층으로 만든 것이다. 일제의 침략 통로였던 인천에서 남대문, 그리고 경북궁으로 연결되는 지역은 더 많이 훼손되었다. 경성부 청이 남촌에 만들어지면서 서울의 중심지가 남쪽으로 이동했다. 우리 조상들이 신성하게 여겼던 남산에 일본인들을 위한 한양공원을 만들었고 아예 신궁을 만들었다. 지금의 남산 팔각정 자리에 원래 목면산신을 모시는 국사당이 있었다. 이 국사당을 인왕산으로 옮기고 자신들의 조욕인 신도를 조선에 뿌리내리고자 신궁을 지었다. 신사보다 격이 높은 신궁은 일본에도 몇 군데 없는데 그걸 조선의 심장부인 남산에다 떡하니 세운 것이다. 또한 조선의 군인들이 훈련하던 곳을 없애버리고 거기 동대문운동장을 지었다. 일제는 신궁에 신체를 들여오는 날을 기념하여 동대문운동장에서 기념 이벤트도 하였다. 그래서 남산 신궁에서 북촌을 조망하는 것이 일제강점기의 대표적인 유람코스 중 하나였다

     

    청계산 복개 공사

    남산에는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는 사찰도 지었는데 그 사찰 또한 궁궐의 전각들을 가져다 지었다고 한다. 심지어 정문은 경희궁의 정문인 홍화문을 가져다 사용하기까지 했다. 안타까운 점은 해방후에도 궁궐의 전각들이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엉뚱한 곳에 방치된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한강도성의 성곽 돌도 개인주택이나 알 만한 건물의 축대나 기초로 쓰인 경우가 많았다. 경북궁의 수많은 전각들도 허물었고, 심지어 궁궐을 동물원이나 공원으로 조성해 조선왕실을 무시했다. 창덕궁 후원을 비원,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부르다 보니 너무 익숙해졌다. 청계천은 조선시대에 높아지는 하상으로 홍수가 발생하고 악취가 심해서 준설작업을 했었지만 1930년대에는 일제가 군수물자의 빠른 운송을 위해 적극적으로 복개를 하게 되었다. 도성 중앙을 흐르는 하천이다 보니 물자의 신속한 운송을 위한 도로 건설에 아주 긴요했다. 해방 후에도 우리 역시 개발 논리에 이끌려 아무런 비판의식없이 복개를 계속해 도로를 만들었다. 그위에 고가도로까지 설치하면서 청계천은 이름뿐인 하천으로 전락했다

     

    박흥식사장과 화신백화점

    소들도 엄청난 수난을 겪었는데 조선은 농업국가로 소를 함부로 죽이지 않았다. 1920년대 이후 일제가 군수식품으로 쇠고기 통조림을 만들면서 도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살코기 통조림을 만드는데 사용했고, 나머지는 버렸는데 조선사람들은 그 버려진 부산물인 소머리, 내장, , 꼬리 등으로 설렁탕 등의 음식을 만들게 되어 일제강점기에 설렁탕이 한국인의 외식사의 대표적 음식이다. 192025곳이던 설렁탕집이 1924년에는 100곳을 넘게 되었다. 갈비도 쇠고기 통조림을 만들고 남은 부산물로 1920년 만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평양에서 그 갈비를 이용한 것이 평양갈비가 탄생했다. 일제의 위세가 커질수록 남산 일대의 왜색은 짙어지고 명동은 점점 더 번성하게 되었다. 남촌에 근대식 백화점이 들어서는 등 날로 화려해지는 동안, 북촌과 종로는 쇠퇴로 걷게 되었으나 그나마 종로에 화신백화점이 조선 자본으로 유일하게 만들어졌다가 해방 이후 도산했다. 그 자리에는 대기업 건물이 들어섰다

     

    일제 경성부 지도

    서울은 1910년 경술국치 이후 행정구역이 몇 차례 변하였다. 1914년 일제는 행정구역을 개편해 한성부를 경기도에 포함시키고 면적도 축소시켜 경성부라 부르게 되었다. 경성부의 범위가 한강과 그 이남으로 확장된 것은 1936년 경기도 시흥이었던 영등포 일대가 경성부에 편입되면서부터다. 지금의 관악구, 동작구, 영등포구가 한강 이남에서 가장 먼저 경성에 편입되었다. 1943년 일제강점기 때 경성에 구라는 명칭이 등장하게 되었다. 지리적으로나 상징적으로 종로쪽이 중구가 되어야 할 터인데 남산쪽이 중구가 된 것이다. 일제가 청계천을 기준으로 북쪽은 종로구, 남쪽은 중구라고 이름 붙인 것이다. 궁궐과 종묘사직이 있는 조선시대의 중심지가 아니라 일본인이 다수 거주하던 지역이 중구가 되었다. 서울은 해방 후 서울특별시로 승격하면서 다시 경기도에서 분리되었다. 1963년에도 서울의 행정구역이 크게 확장되면서 경기도였던 많은 지역이 서울로 편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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