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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양은 동서남북 그리고 중부로 오부로 나누고 성저십리도 포함했다는데
    아들을 위한 인문학/한국사 2021. 9. 4. 05:37

    한양에 도성을 축조한 다음, 성안은 5개 지역으로 나누었다. 백악산 아래 북촌, 남산 아래 남촌, 낙산 아래 동촌, 경북궁 서쪽의 서촌, 청계천 아래와 수표교 일대의 중촌이 그것이다. 그래서 당시 한양을 그린 지도를 경조오부도라고 명명했다. 하지만 한양이 오부로만 구성된 것이 아니다. 조선시대 한양은 한성부라고 해서 도성 안과 밖 사방 10리에 해당하는 지역인 성저십리를 포함했다. 삼각산(북한산)-용마산-관악산-덕양산에 이르는 외사산 범위와 비슷하다. 오늘날의 서울의 범위와 거의 유사하다. 성서십리는 함부로 훼손하지 못하도록 관리된 지역이다. 그래서 조선전기에는 사람이 얼마 살지 않았지만 후기에 가면 한양 인구의 절반 정도가 성서십리에 거주했다고 한다

     

    성서십리에 살았던 사람들은 주로 농사를 지어 도성에 내다 팔았다. 특히 동대문 밖의 청계천과 중랑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한 성동구 지역은 토지가 비옥해서 농사짓기가 참 좋았다고 했다. 동대문 밖 왕십리나 살곶이벌 등지가 대표적인 농사지역이었다. 제기동에 제사지내던 터가 남은 것도 그런 연유이다. 전농동과 제기동은 임금이 직접 농사짓던 논과 제사지냈던 선농단이 있던 곳이기도 하다. 이 선농제에서 설렁탕이 유래했다. 선농단에서 제를 지낸 후 각 도에서 올라온 농부들의 점심으로 소를 잡아 곰국을 끓이고 뚝배깅 밥을 말아 내놓았다고 해서 선농탕으로 부르다가 지금의 설렁탕이 되었다. 또한 동부지역에서 풀이 잘 자라는 탓에 말을 키우던 곳이라 마장동이 되었고, 목장 안의 넓은 들은 장안평, 목장 맞은편에 있는 동네라서 면목동, 암말을 기르던 동네라 해서 자양동이라 불렸다. 논이 많았던 신답과 용답은 논 답자를 지명에 넣었다. 이곳은 일제강점기에 동양척식주식회사가 논으로 재정비했던 곳이기도 하다. 서쪽에도 홍제천과 창천 일대는 대표적인 농사지역이었다. 임금이 직접 나와 농사가 잘되는지 살펴보던 망원정이 있었던 곳이었다

     

    한강을 이용해 전국의 세곡과 상품이 한양으로 올라왔으니 성저십리의 한강지역인 마포, 용산, 서강 등지는 전국에서 올라왔고 17세기 이후에는 상업의 중심지로 번성하게 되었다. 한양은 이미 상업도시로 변모하는 중이었고 한강에 수많은 포구가 있었던 것도 이에 대한 반증이다.

     

    대부분의 양반들이 북촌에 모여 살았다. 중대 사안이 생기면 언제든 입궐해야 하니 궁궐에서 멀리 떨어져 살 수가 없었다. 한성부는 청계천을 기준으로 북촌과 남촌으로 나뉘는데, 북촌에서도 남향이라 해가잘 들고 화강암지역이라 물 빠짐도 좋은 인왕산 부근은 상대라 하여 양반 중에서도 세도가들이 살았다. 청계천 남쪽의 남대문이나 왕십리 일대 같은 동촌은 평민이나 하급 군인 등이 살았다. 천남 이나 하대라 불렀다. 청계천은 여름철 집중호우가 내리면 홍수 피해가 큰 곳이라 살기에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왜란과 호란을 거치며 농촌지역 사람들이 대거 서울로 올라오면서 거주지가 만들어졌다. 복개하기전에 판잣집이 많았다. 남산 방면이 남촌이 된다. 오늘날 남산동 일대인데 이곳은 양반의 자손이긴 하나 권문세가 아니거나 현직에 있지 않은 사람들이 주로 살았다. 남산골 샌님, 딸깍발이의 고향인 셈이다. 남산의 북사면아러 음지이고 땅이 질어 거주조건이 좋은 곳은 아니었다. 물론 이름있는 집안도 있다. 12명의 정승을 배출한 동래 정씨 일가도 살았고, 지금의 인현동 일대에는 류성룡,이순신,원균,허균,정약용 등도 거주했다. 하지만 북촌에 비해 그 세가 많이 약하다. 오늘날 종로에 해당하는 청계촌 북쪽의 시전 부근은 물 빠짐이 좋은 편이라 상인이나 시전에 팔 물건을 만드는 중인들이 많이 거주했다. 이곳이 바로 중촌인데 수공업자들이 많이 거주했다. 일제강점기에도 청계천 이남에서는 일본인의 주도로 공업이 발달하게 되어서 따지고 보면 청계천 부근의 공업도 역사가 상당한 셈이다

     

    중촌과 운종가 근처에서 만들어진 물건들은 종로의 시전에서 판매했다. 그런데 시전은 간판도 없고 물건도 상점 밖에 몇 개 진열하지 않았다고 한다. 간판은 전차가 등장하는 1899년 이후에나 만들어졌다. 시전이 2천칸이 넘는 규모여서 여리꾼이라는 중개인이 필요했다. 그는 물건을 사려는 사람을 해당 상점에 데려가 흥정을 붙여 거래하도록 하고 소개료를 받는다. 근대 이후에는 거짓말품을 파는 사람으로 간주되어 퇴출되었다. 간판이 생기면서 여리꾼은 필요가 없게 되기도 했다

     

    국가가 관리하던 시전 외에도 다른 시장이 있었다. 국가 허가없이 어지럽게 좌판을 벌이는 사상난전이라 하였다. 그중 동대문 근처의 배오개시장은 임진왜란 후 재정이 열악해진 국가가 군인들에게 급료를 지급하지 못하게 되자, 군인들과 그 가족들이 군포와 포목 등을 팔기 시작하면서 형성된 시장이다. 그러니 동대문 지역 의류상가 역시 역사가 오래되었다. 우리나라 최고의 역사를 가진 남대문시장도 19세기말 남대문 밖에 형성된 난전인 칠패시장이 그 유래이었다. 남대문 좌우에 있던 가건물들을 정리하고 남대문 밖에 있던 칠패시장을 선혜청 안으로 옮기면서 시작되었고 남문 내 장시로 불렀다. 종로의 시전은 그 세력이 많이 약해졌지만, 동대문시장과 남대문시장은 자생적으로 성장해서 우리나라 최대시장이 된 것이다. 사실 종로 시전이 쇠퇴한 것은 일제가 남촌에 근대적 상업시설인 백화점을 도입하면서 종로 일대의 상권이 쇠퇴하게 되었다. 종로는 일제강점기 이후 남촌에 위치한 명동 때문에 쇠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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