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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은 한양을 도읍으로 정하게 된 이유는 무엇이며 어떻게 형성되었나
    아들을 위한 인문학/한국사 2021. 8. 28. 03:59

    고려시대 한양은 남경이라 불렸다. 개경과 서경과 함께 주요 도시로 여겨졌다. 잇단 외침을 받는 와중이라 개경의 지기가 쇠한 까닭이라 여겨 상대적으로 지기가 왕성하다 싶은 남경으로 천도할 것을 고민했다. 고려 초기만 해도 북진정책을 뒷받침한다는 명목으로 서경 길지설을 내세웠지만 중기 이후 북진정책이 퇴조하면서 남경 길지설이 힘을 얻었다. 그래서 한양을 남경으로 승격시키기까지 한다. 하지만 결국 남경으로 도읍을 옮긴 건 조선 태조 이성계이다. 새왕조 후보지로 물망에 오른 곳이 계룡산 부근으로 도읍을 옮기려고 어느 정도 공사를 진행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부근의 하천 교통이 원활하지 못해 결국 한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당시 한양은 고려 수도였던 개성 못지 않게 수륙교통이 모두 편리했고 물자도 풍부했으며 국토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다는 입지요인을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주변이 산지로 둘러싸여 있으니 외적을 막아내기에도 더할 나위 없었다

     

    한양도성과 낙안읍성의 차이는 무엇일까 도나 읍 모두 오늘날의 시와 유사하다. 다만 읍 중에 종묘가 있는 곳을 도읍이라 부르고 그 도읍에 성을 쌓으면 도성이되는 것이다. 한양도성에는 아주 핵심적인 바로 종묘가 있다. 종묘는 역대 임금과 왕비의 위패를 무시는 사당이다. 그리고 사직이라고 사는 토지신이고 직은 곡식신을 말한다. 경북궁 서편에 사직단이 있어 이곳에서 토지신과 곡식신에게 제사를 지낸다. 종묘사직은 동아시아 국가에서 도읍을 계획하는데 있어서 기본요소이다. 이는 <주례>의 고공기에서 나오는 左廟友社의 원칙에 따라 도시를 계획했기 때문이다. 이는 조선의 국가적 성격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종묘는 조상신을 모신 곳이니 유교적 전통에 입각한 국가이념을 보여주는 것이고 사직은 조선이 농업을 생산기반으로 둔 나라라는 것을 의미한다

     

    또 하나 도읍 설계에 주요한 원칙은 帝王南面이다. 제왕은 남쪽을 바라보며 만백성을 살핀다는 뜻이다. 그래서 경북궁은 백악산을 등지고 남쪽을 보고 입지하도록 지어진 것이다. 당시 무학대사와 정도전은 주산을 어디로 하느냐를 두고 첨예하게 대립했다고 한다. 인왕산을 주산으로 하면 불교가 흥할 거라는 속설을 신하들이 제왕은 남면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고. 그 결과 백악산을 주산으로 정하여 유교국가로 나아갔다. <주례>에는 前朝後市의 원칙도 나온다. 궁궐 앞에 정부 즉 6조가 자리하고 궁궐 뒤에는 시장을 배치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한양은 궁궐 바로 뒤에 백악산이 딱 붙어 있어 공간이 없다. 그래서 궁궐 앞쪽에 시장을 조성하게 되었다. 중국은 넓은 평지에 건설하기 때문에 <주례>에 따를 수 있지만 우리나라는 산이 많고 들이 적어 원칙대로 지키기가 힘들었다. 그러니까 한양은 융통성 있게 도읍이 형성된 것이다.

     

    도시는 도읍과 시장이 합쳐진 말이다. 정치적 중심지인 동시에 경제적 중심지라는 의미이다. 한양의 시장은 지금의 종로 일대에 해당하는 돈의문에서 흥인지문에 이르는 거리에 형성되었다. 시장에 섰으니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을 것이고 그래서 지금의 종로 네거리를 雲從街(운종가)라고 하였다. 조선왕조는 남대문에서 종로에 이르는 길에 2천여 칸이 넘는 행랑을 지어 시전을 조성하고 정부에서 필요로 하는 물건을 조달했다

     

    조선시대에는 경복궁에서 서울역으로 연결되는 도로가 없다. 대신 종각에서 남대문으로 이어지는 정자 모양의 길이 나 있다. 경북궁에서 시작된 길은 황토현이라는 언덕에서 끝이난다. 도성에 화재가 날 경우 불이 궁궐로 확대되는 걸 막기 위해 길이 바로 이어지지 않도록 한 것이다. 한양이 풍수적으로 불에 약하다는 것이 약점이어서 다양한 대책이 마련되었고, 그런 점에서 도로 설계에도 반영되었다. 또한 경회루, 성균관의 연못, 숭례문의 세로 현판, 근정전 앞에는 드무라고 해서 벽사의 의미를 담은 방화수도 준비해 두었다. 그리고 불을 먹는 상상의 동물인 해치 상을 광화문 앞에 세웠다. 그 외에도 사대문 근처에 동서남북 4곳의 인공연못을 만들었으나 경복궁은 왜란 중에 전소되기도 했다

     

     

     

    종각근처에 가면 피맛골이 있다. 이는 조선시대 백성들이 고관대작의 행차 때마다 말을 피하느라 고생하느라 뒷골목으로 다니자 해서 생긴 피맛길이 골목을 이루어 피맛골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싹 밀어버리고 현대식으로 개발논리에 따라 깨끗하게 만든 것이 옛 정취가 사라져 아쉬움이 남는다. 한편 2007년 백악산이 전면 개방되면서 이제는 조선시대에도 행해졌던 순성놀이를 다시 할 수 있게 되었다. 한양도성은 내사산인 백악산-인왕산-남산-낙산을 중심으로 성곽을 쌓고 주요 출입구인 4개 대문, 즉 숙정문-돈의문-숭례문-흥인지문과 4개의 소문, 창의문-소의문-광희문-혜화문을 만들어 완성했다. 성벽은 한번에 완성된 것이 아니다 한번 세워놓은 부분도 노후하거나 무너질 때마다 보수하기도 했다. 성벽을 보면 4가지의 다양한 모양의 성돌로 되어 있는데 후대로 갈수록 자연석을 다듬어 사용했고 크기도 커졌다. 성돌은 태조와 세종대에는 남산이나 낙산 일대에서, 숙종대에는 정릉 주변에서 채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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