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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년 독립군의 최대 성과를 낸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은 어떻게 전개되었나
    아들을 위한 인문학/한국사 2021. 8. 14. 04:38

    1920년에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
    홍범도장군과 김좌진 장군

    3.1운동 후 민족의 지도자들은 광복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무장독립운동이 급선무임을 자각했다. 이에 따라 간도를 비롯한 만주나 연해주 지역에서 수많은 항일단체가 조직되기 시작했다. 이 지역에서의 활동소식이 국내에 전해지자 수많은 청년들이 만주와 연해주로 건너와 독립군에 가담했다. 만주의 국민회군, 북로군정서군, 대한독립군, 서로군정서군, 대한의용군 등이 조직되어 일본군과 치열히 교전하면서 독립투쟁을 벌여 나갔다. 이 가운데 가장 눈부신 전과를 기록한 것이 바로 홍범도가 거느린 대한독립군의 봉오동전투와 김좌진이 거느린 북로군정서군, 국민회 산하 독립군이 거둔 청산리대첩이다. 연해주 지역에서 가장 많은 전과를 올린 대한독립군의 사령탑 홍범도는 1868년 평양에서 태어나 머슴과 노동자로 전전하다 의병운동에 뛰어든 입지전적 인물이다. 1889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난 김좌진은 3.1운동때 만주로 건너가 북로군정서를 조직하고 총사령이 된 후 이 지역 독립운동 지휘한 전설적인 인물이다.

    봉오동전투

    봉오동전투는 191964일의 삼둔자전투에서 시작되었다. 삼둔자는 두만강 중류 대안의 간평이라 불리는 작은 마을이다. 이곳에서 30명가량 되는 독립군 소부대가 강 건너 일본 헌병순찰대가 주둔하고 있던 강양마을을 기습했다. 기습당한 일헌병대는 독립군을 추격했으나 오히려 삼둔자에서 크게 패하고 말았다. 그러자 일본군은 즉시 봉오동의 적 근거를 소탕하라는 작전명령을 하달했다. 봉오동의 독립군 사령관 홍범도는 적의 내습을 미리 알아채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마을 주민들은 물론, 가축 및 곡식 일체를 비워버리는 이른바 청야작전을 폈다. 그리고 봉오골 곳곳에 각 중대를 포진시켰다. 독립군의 포위망을 전혀 모르고 일본군은 독립군의 완전소탕이라는 거창한 목표를 안고 67일 봉오골로 들어섰다. 그러나 홍범도의 신호탄을 시작으로 일본군은 완전히 포위된 채 무방비 상태로 독립군의 공격을 받아야 했다. 이 전투에서 독립군은 일본군 157명을 사살하고 3백명에게 중경상을 입혔다. 봉오동전투에서 대패한 일본군은 만주의 악명 높은 마적단을 시켜 훈춘 일본영사관을 습격시키는 조작극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이번의 마적단의 속에는 러시아인, 중국군 그리고 한국 독립군이 섞여 있었다고 발표하고 군대를 훈춘에 불법주둔시켰다. 이른바 훈춘사건이라 불리는 이 사건을 기회로 일제는 소위 간도출병을 단행했다

    청산리대첩

    일본군의 간도침략으로 독립군은 연길, 용정을 거쳐 해란강을 따라 동쪽으로 이동했다. 이 장정에서 홍범도 군대는 이도구에 집결하고 김좌진 부대는 삼도구, 즉 화룡에 집결하기로 했다. 이 삼도구에서 멀지 않는 곳이 바로 청산리 계곡이다. 청산리 계곡은 25km에 달하는 긴 계곡으로 통행이 곤란할 정도의 울창한 삼림지대였다. 청산리 전투는 19201021일 아침 8시에 시작되어 26일 저녁까지 계속된 6일 전쟁이었다. 이 전쟁에 참가한 독립군의 주력부대는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군과 홍범도 장군의 대한독립군이었다. 병력은 겨우 2천명을 헤아렸다. 반면 일본군은 2.5만명의 훈련된 정예군이었다. 일본군과 독립군간의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일본군은 유리한 지형을 이용한 독립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김좌진 부대를 피해 도망하던 일본군은 다시 포진하고 있던 홍범도 부대의 협공을 받아 완전히 괴멸하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은 독립군과 군복색깔이 비슷한 자신들의 군대를 독립군으로 오인하고 공격하는 우를 범하기도 했다. 6일간 전쟁에서 일본군은 2천명의 사망과 1300명의 부상자들을 생겼다. 반면 독립군의 사망자는 1백명 남짓했다. 물론 대승이지만 전투는 처절했다. 기관총수들은 대부분 부상을 당했고 기관총 중대장 최인걸은 기관총을 끌던 말이 쓰러지자 새끼줄로 자기 몸을 기관총 다리에 매고 싸웠다. 북로군정서군은 처절한 전투를 계속했고 벌판은 시체로 덮혔다. 청산리 대첩은 일본군의 간도출병 이후 독립군이 최대의 전과를 얻어낸 가장 빛나는 승리였다. 일본군은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에서 패배해 독립군 대토벌계획을 세우고 계속해서 독립군을 추격했다. 독립군 부대들은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여 독립군 조직을 통합하여 노령지역으로 이동했다. 한편 소련의 배반으로 독립군은 무장해제되고 포로가 되는 자유시 참변을 겪고 말았다

     

    이후 봉오동전투의 영웅 홍범도는 소련의 한인 집단이주정책에 따라 중앙아시아 크즐오르다로 이주하여 쓸쓸한 만년을 보냈다. 1943년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73세의 일기로 눈을 감았다. 이보다 앞서 청산리전투의 김좌진도 자신이 운영하던 정미소 직원으로 위장한 자객의 총탄을 맞고 1930년 세상을 떠났다. 잃어버린 조국을 다시 찾겠다며 만주벌판을 누볐던 두 장군의 말년을 쓸쓸하게 광복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이번 문재인 정부는 카자흐스탄 대통령과 합의하여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모셔와 대전 현충원에 안장한다고 하니 그나마 조국에 묻혀 평안히 영면할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한편 국가보훈처장을 특사로 하여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이사장인 우원식의원과 암살과 대장 김창수의 독립투사의 역할을 한 조진웅이 국민대표로 가게되었다. 정부는 유해 봉환에 맞춰 홍범도 장군에게 애국심고취 및 민족 정체성 함양 등의 공로를 인정해 1등급 훈장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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