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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년 문화의 과거와 오늘, 신촌 & 홍대 앞을 돌아보면
    아들을 위한 인문학/국내여행 2022. 12. 17. 04:05

    신촌은 조선시대부터 불리던 새터말이라는 지명을 한자로 옮겨 적은 이름이다. 신촌은 조선시대부터 한양 서부 지역의 교통 결절지었다. 한강의 수운이 중요했던 조선시대에 서강은 일찍이 도진취락(渡津聚落)이 발달했던 곳이다. 한데 한양도성과 서강을 연결하는 길목에서 신촌이 위치하다 보니 자연스레 유동인구가 많으 드나들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도 신촌 일대는 한적한 농촌 지역이었지 촌락 발달은 미미했다. 그러다가 1920년 경의선 신촌역이 개통되었다. 그리고 1917년 연희전문학교의 설립과 1935년 이화여자전문학교의 신촌 이전이다. 이로써 현재의 연세대와 이화여대의 신촌캠퍼스가 생기게 되었고 이곳에 대학촌이 태동하게 되었다. 그리고 1930년 후반에 신촌도로와 로터리 등 가로망 사업이 추진되었다

     

    신촌로타리(60-70년대)

    한국전쟁 이후 이농인구와 피난민이 몰려들었다. 신촌은 형편이 어려운 서민들이 거주하는 도시로 빠르게 성장하다가 1970년대에 들어서며 번창하면서 인구가 줄어들고 1984년 지하철 2호선 신촌역과 이대역이 개통하면서 서울의 부도심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모더니스트 건축가 김수근이 신촌의 도시설계를 맡아 고층 상업도시와 문화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신촌시장이 있던 터는 예로부터 강화,인천,마포 쪽에서 한양으로 가던 사람들이 아현고개를 넘기 전에 머물렀던 주막들이 많아 주막거리로 불렸다고 한다. 한국전쟁 이후 생필품과 식료품을 파는 서민들의 시장으로 자리 잡아온 신촌시장은 현대화 사업으로 그 명맥을 다하게 되었다. 그 자리에 1992년 그레이스 백화점이 들어섰고 주거지도 중산층 아파트로 고급화되면서 가난한 서민들이 살 공간이 줄어들었다. 과거 달동네가 자리하던 와우산이 지금은 휴식공간인 와우공원으로 바뀌었다

     

    한편 신촌하면 대학가를 떠올리게 된다. 연세대와 이화여대 말고도 서강대와 홍대가 있기 때문이다. 신촌은 서구식 근대교육이 시작된 곳, 최첨단 유행이 가장 먼저 유입된 곳이다. 특히 록카페, 노래방, 비디오방 등 방 문화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2호선 신촌역에서 나와 연세대 방향으로 뻗어있는 길이 연세로이다. 현대백화점을 비롯해 대형 쇼핑공간이 들어서 있고 고깃집, 음식점, 카페 당구장 등 대학생들의 수요에 맞는 공간이 들어섰고 3층 이상에는 고시원이나 원룸이 숙박시설이 있다. 최근 청년 취업난이 심해지면서 학생들의 발길이 예전 같지 않고 2014년 연세대 신입생들은 인천 송도 국제캠퍼스에서 생활하도록 하면서 신촌 상점의 고객이 더 감소했다고 한다. 서대문구는 신촌거리를 매력적인 장소로 하기 위해 주말에는 연세로가 차없는 거리로 하였다.여름에는 신촌물총축제가 벌어지고 가을에는 신촌맥주축제가 펼쳐진다.

     

    옛 신촌역은 1920년에 세워진 역사로 1925년 세워진 옛 서울역보다 5년이나 앞서 지어진 건물이다. 구역사는 맞배지붕 형태의 목조 지붕과 벽돌로 이루어진 몸체를 지녔다. 이곳은 한때 통일호를 타고 경기도 장흥 유원지로 놀러 가는 대학생들로 북적였던 곳이었다. 2004년 교외선이 폐지되면서 기능이 약해졌다. 이곳에 새로운 민자 역사가 지어지면서 철거될 위기도 있었지만 보존운동이 일어나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민자 역사가 임대가 않되어 과장 광고에 따른 분양대금 반환소송까지 얽히며 경의선 신촌역 주변은 신촌 일대에서 가장 한적한 장소가 되고 말았다. 한편 1960년대의 이화여대길은 맞춤옷을 파는 양장점과 양화점 그리고 미장원으로 신세대 여성들의 유행을 선도하는 곳이었다. 이대하면 유행과 패션의 메카라는 인식이 있었고 옷을 사고 머리하러 이대를 찾는 사람들이 많았다. 2000년대 들어 강남이나 명동, 동대문이 미용과 의류 패션의 핵심지역으로 재편되었다

     

    이한열열사

    이화여대길은 1호점의 역사를 써지는 도전의 장소이기도 했다. 미스터 피자, 스타벅스, 투썸플레이스 1호점이 이대 앞으로 개업했다. 요즘에도 홍차 전문점, 요거트아이스크림 전문점, 디저트 카페, 스터디카페 등 새로운 시도가 있고 화장품 브랜드숍의 원조 미샤가 2002년 이대 앞에 1호점을 내면서 더페이스샵, 스킨푸드 등 수많은 화장품 로드숍이 이대 앞에 등장했다. 한편 신촌은 1960년대 문인 예술가들의 아지트였고 1970-90년대 사회변혁의 중심지였다. 신촌에 모여드는 젊은이들은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로움, 현실의 모순을 극복한 해방을 꿈꾸며 기존질서에 저항하고 새로움을 모색했다. 첫 번째 장소는 이한열 기념관이다. 19876.10민주항쟁의 기폭제가 되었던 사건이었다. 연세대 앞에서 시위하던 학생 이한열이 최루탄에 맞아 숨진 사건이었다. 2004년 세워졌고 이한열이 입고 있었던 옷과 신발이 진열되어 있다. 두 번째 장소는 홍익문고와 문학의 거리이다. 1980-90년대 대학가에 위치한 인문과 사회과학 전문 서적은 인기가 많았는데 연세대 앞에 있던 알서림과 오늘의 책이 그런 책방이었다. 이후 신촌이 상업화되고 책을 찾는 이들이 대형서점과 인터넷서점으로 몰리면서 폐업하게 되었다

     

    홍대 걷고 싶은 거리

    홍대 지역은 일제강점기에 당인리 화력발전소로 무연탄을 실어 나르던 당인선 철길이 지나가던 곳이었다. 해방이 되고 1960년대 서교동과 동교동 일대에 도시개발이 이루어져 고급주거지가 형성되었다. 서교동에는 최규하 전 대통령이 동교동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거주한 바 있다. 철로 선로 주변 경관은 서민 가옥이 빼곡이 들어서고 1980년 당인리선이 완전 폐선되자 철로 위에는 무허가 판짓잡들과 먹자골목이 들어섰다. 2002년 월드컵을 앞두고 이 허름한 무허가 판자집들을 철거하게 되었고 그곳에 걷고 싶은 거리가 조성되었다. 한편 홍대가 미술의 공간으로 자리매김하는데는 홍대 역사와 관련이 있다. 19615.16군사쿠테타로 권력을 잡은 군사정권은 대학정비령을 내리는데 이때 홍대는 법정학부, 문학부, 이학부가 모두 폐지하고 미술학부만 살려 홍익미술대학으로 대폭 축소되었다. 이후 종합대학교로 승격되었지만 대표분야는 미술로 이어지고 있었다. 1990년대 중후반에는 비교적 임대료가 싼 홍대로 문화예술인들이 모여들면서 독립문화, 클럽문화가 싹트게 되었다.

     

    홍대문화공원(홍대놀이터)

    지하철 2호선 홍대입구역에 2010년 공항철도와 2012년 경의선까지 개통되면서 홍대 앞은 유동인구가 증가했다. 이미 걷고 싶은 거리, 피카소의 거리 등의 조성으로 상업자본이 깊이 침투한 상황이었는데 교통이 편리해지면서 더 많은 인구가 몰리게 되자 임대료는 더욱 치솟았다. 이 과정에서 많은 공연장이 문을 닫았고 예술과 인디문화를 가꿔온 주체들이 타 지역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한편 프리마켓이 열리는 홍대놀이터가 있다. 원래 홍익어린이공원이지만 어린이가 놀지 않아 홍익문화공원으로 명칭이 바꾸었다. 매주 토요일에는 예술시장이 열리는 장소로 더 유명하다 그리고 땡땡거리와 경의선 책거리가 있는 경의선 숲길이다. 경의선 기차가 지나가면 건널목 차단기가 내려지고 땡땡소리가 났다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2005년 경의선이 지하화되자 이곳은 황량한 공터가 되었는데 주민들이 음악인, 미술인들과 협력해 땡땡거리마켓을 열었다. 와우교 아래에서 경의선 홍대입구역 6번 출구까지 구간에는 책의 주제로 경의선 책거리가 조성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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