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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탄광의 도시에서 고갯길 넘어 관광도시로 나아가는 문경에 가보면
    아들을 위한 인문학/국내여행 2022. 7. 9. 05:38

    조선시대에는 한양을 중심으로 X자형 도로망을 구축했다. 각 지역에서 수도 한양으로 가는 주요 길은 9대 간선도로로 그중 영남지방에서 서울을 잇는 천리길을 영남대로라고 한다. 소백산맥을 넘어가는 영남대로는 또 세 갈래의 길로 나뉘는데 좌도, 중도, 우도라고 한다. 그중 중도가 바로 문경새재 길이고 가장 빠른 길이다. 참고로 영남의 좌도가 추풍령, 우도가 죽령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한편 문경새재의 새재는 새로 난 길이라는 뜻도 있고 어떤 이는 새를 사이로 풀이해 하늘재와 이화령 사이의 고개라는 뜻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한자어로는 조령인데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곳이라기도 하고 경상도에서 쌔라 부르는 억새가 많아 억새풀이 우거진 고개라는 뜻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 역사가 오래된 고개는 하늘재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 아달라왕때 북쪽으로 거슬러 올라가고자 가장 낮은 고갯길을 활발히 이용되다가 조선시대 관문이 새재에 설치된 이후 문경새재(조령)가 대표적인 고갯길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하늘재가 더 완만한 고갯길이었지만 충주까지 이르는 길이 새재보다 더 멀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삼국시대와 고려시대 때만 해도 충청도와 경상도를 잇는 주요 교통로가 하늘재였던 셈이다. 그러다 하늘재(계립령) 이후 새롭게 난 길이라는 의미의 문경새재가 생기고 셋 중 가장 최근에 이화령이 생긴 셈인데 이는 1925년 일제에 의해 개통된 신작로이다.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에는 하늘재, 조선시대에는 새재, 20세기에는 이화령으로 이렇게 시대에 따라 고갯길의 번성이 달랐다

     

    이화령하면 배나무가 많아야 하는데 그런 연관성은 없다. 2007년 옛 이름을 되찾아 이화령을 아웃릿재라고 부르고 있다. 일제강점기 백두대간의 기를 막기 위해 영남대로의 조령 부근에 일부러 이화령 길을 닦았다. 좀 더 완만한 산세를 보여주는 곳이기도 했기 때문에 신작로를 개발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그러면서 새재 길이 쇠퇴하였다 국도 3번에 있는 이화령의 터널은 1998년 개통되었지만 건설시 예상대로 통행량이 현저히 적어 적자가 계속되어 2007년 결국 통행료를 내는 요금소는 폐쇄하였다. 이곳은 과거길로 부산 동래에서 한양에 이르는 고개는 추풍령 15일과 문경새재, 14일 죽령 16일로 나누어 한양으로 온다. 유독 선비들은 문경을 주로 고집했는데 문경 지명은 경사스러운 소식을 듣는다라는 뜻이 내포되어있다. 게다가 추풍령을 넘으면 추풍낙엽처럼 우수수 떨어지고 죽령을 넘으면 대나무의 미끈함 때문에 미끄러질까 걱정했다

     

    문경새재는 3개의 관문으로 되어 있다. 1관문은 영남 제일관문이라는 주홀관이다. 관문의 축성은 임진왜란을 막지 못한 뼈 아픈 과거에서 만들어졌다. 문경길이 한양도성까지 가는데 중요한 군사적 길목이다. 한편 임진왜란때 의주까지 피난을 가게 된 선조는 왜란이 끝나자 새재에 조곡관(2관문)을 설치했고 병자호란이 끝난 뒤엔 1708년 숙종이 가장 험준한 조령에 조령관(3관문)을 설치했다 성곽에는 도성수나 석재 운반한던 책임자의 이름을 성벽에 새기도록 하였다

     

    문경새재는 선비뿐만 아니라 수많은 서민들이 목을 축이고 갔을 주막도 관리들에게 숙소를 제공하고 말을 관리하던 조령원터도 이 길목이 있어 조선의 주요 도로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특히 조령원과 동화원 등은 관리들이 출장으로 오고갈 때 숙식의 편의를 제공했던 장소이기 때문에 정부 관료들은 주로 지나던 도로였다는 걸 보여주고 있다. 문경아리랑이라고 문경새재는 왠 고개냐 구비야 구비야 눈물이 난다라는 소절이 있는데 마음이 아프다. 조정에 진출하여 세상을 바꾸어 보겠다. 수많은 청춘들이 과거에 낙방하여 무거운 발걸음으로 되돌아오던 길이었다. 또한 먹고살기 위해 넘나들었던 고단한 길이자 귀양 가던 자들의 유배길이기도 했다. 문경은 낙동강의 3대 발원지이기도 하여 문경새재는 낙동강과 남한강을 연결하는 통로가 된다

     

    여기에는 꿀떡고개라는 곳도 있다. 꿀떡을 먹으면 과거합격을 한다고 생각해서 만든 것으로 보인다. 또한 숨이 꼴딱꼴딱 넘어간다고 해서 꼴딱고개라고도 불렀다.. 이 고개를 지나면 고모산성에 닿는다. 고모산성은 삼국시대 초기인 2세기경에 축조된 것으로 삼국의 접전지였다. 또 진남문의 왼편 성벽길을 따라가면 영남대로 옛길 중 가장 험한 길이 나온다 관갑천잔도, 토천, 토끼비리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는 한국의 차마고도이다. 비리는 벼루의 사투리로 강이나 바닷가의 낭떠리지로 절벽 위의 아슬아슬한 길로 왕건이 토끼를 따라 걸었다가 하여 토천이라 하였다

     

    문경시로 들어서면 문경읍과 점촌에서 버스가 선다. 문경읍이 대표지역일 것 같은데 점촌에 문경시청이 있다. 문경은 1960-70년대 탄광도시로 각광을 받았다. 강원도 남부지역과 경상북도 지역은 고생대 지질로 많은 식물이 썩어들어가며 석탄이 만들어진 곳이다. 따라서 문경지역은 탄광도시로 산업화시대의 원동력이 되었던 곳이다. 한편 1949년 문경군의 도청 소재지가 문경면에서 점촌리로 옮겨진 뒤 점촌지역은 크게 발전을 시작했다. 그결과 1956년 점촌읍으로 승격되었고 같은해 점촌과 가은을 잇는 산업철도가 개통되면서 1969년에는 문경까지 연장되었다. 1986년에는 점촌읍이 다시 시로 승격했다. 따라서 도보교통의 중심지였던 문경은 군으로 산업철도교통망의 성장으로 발달한 점촌은 시로 변모한 것이다

     

    그러다가 1995년 지방자치가 본격적으로 시행되면서 중심 도시와 농촌을 하나의 생활권으로 묶는 방안이 추진되기 시작되었다. 272개의 기초자치단체를 230개로 줄이고 문경군과 점촌시가 통합되어 문경시로 탈바꿈하였다.. 석탄산업합리화정책으로 제 2탄전지대로 불리며 활기찼던 도시는 석탄이 사양화되자 쇠퇴하기 시작했다. 석유 및 천연가스로 에너지 구조가 바뀌면서 연탄소비의 감소와 채산성 감소로 인해 비경제적인 탄광을 국가 정책 차원에서 정리하게 된 것이다. 이때 전국 탄광의 67%가 정리되었다 문경의 주요 철도역도 1995년 폐선되기 시작했다. 문경이 탄광도시로 흥했던 흔적은 탄광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1938년부터 1994년까지 석탄을 생산했던 은성광업소가 있던 자리에 1999년에 건립되었다 폐철로를 활용한 레일바이크도 관광상품으로 등장하였다. 2005년 정선을 시작으로 해서 삼척, 문경, 보령, 양평 등 다양한 지역에서 시도하고 있다. 문경은 산업과 에너지 구조 변화로 인해 석탄자원 도시에서 관광산업의 중심지로 성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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