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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산군의 오해와 진실은
    아들을 위한 인문학/한국사 2021. 2. 4. 04:12

    연산군은 성종과 폐비윤씨 아들로 폭군정치의 아이콘으로 불리우는데 정확히 말하면 재위 12(1494-1506)사이 10년간은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펼치다가 어머니 죽음에 한마디로 맛이가서 태도가 돌변했다고 볼 수 있다. 연산군 10년 치적은 백성을 위해 조세도 감면하고 환곡제도를 실시했으며 명나라 비단기술을 빼오라고 하기도 했으며 여진족과 왜구 침입에 백성들 보호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어머니 죽음의 사연을 알고 정신이나가게 되어 갑자사화 후 2년간은 폭군정치를 시행했다고 본다. 연산군은 태종과 세조보다 독재 전제정권을 휘둘렸다고 평가를 하기도 하는데 이 또한 사림세력을 무참히 학살하고 대간을 통해 왕의 심기를 건드리는 삼사를 폐하고 43경 등 유학경전 등을 논하는 경연을 폐하고 심지어는 말조심하는 신언패를 차게 하였다. 또한 모자에는 충성이라는 글자로 대신들을 꼼짝 못하게 했고 사냥으로 민가에 피해를 주기도 했다. 사림의 세력을 제거하는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를 일으켰는데 사화는 사림파의 화를 말한다. 무오사화는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김일손의 사초에 들임으로 연산군이 초항우사건을 사초에 실은 것은 세조가 단종을 제거한 것은 쿠테타라고 비유하고 있어 연산군의 조상이 지금의 말하면 전두환 자손이라고 해서 사림세력을 제거한 사건이다. 간신이라고 하는 임사홍이 연산군의 외할머리로부터 피묻은 옷을 보여주고 연산군은 맛이 갔고 결정적으로 2년간 폭군이 된 사건이 갑자사화인데 성종과 인수대비가 연산군의 어머니 윤씨를 폐하고 어머니를 죽이자고 결정한 어전회의에 참석한 대신과 3대를 사지를 찌지는 능지처참을 했다 특히 정인지와 한명회는 죽은자의 유골을 박살내는 부관참시를 당하는 등 피의 보복을 자행했. 연산군은 30세부터 젊은 혈기에 여자를 밝혀서 조선의 여자는 나이불구하고 자기 것이라 생각하고 색을 즐겼는데 특히 장녹수와도 통정했고 특히 채홍사라는 조선의 예쁜 여자를 고용하는 관리를 고용하여 조선의 1만명을 뽑아서 놀았다고 해서 우리가 말하는 흥청망청의 기원이 되기도 하였다. 또한 연산군은 성도착증 환자로 평가되는데 무수리를 궁궐 마당에서 성욕을 풀기도 하고 사대부부인을 궁궐로 불러 여러날 간통을 하기도 하며 월산대군의 부인(연군산의 큰어머니)도 근친상간하여 아이를 잉태하자 자결하게 하기도 하였다. 그 피해가 커서 충신인 김처선이 간언을 하자 그 자리에서 사지를 자르고 백성 등의 상소가 심하자 한글사용도 금하는 등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행하였다. 이에 반기를 든 대신들이 연산군의 이복동생 진성대군인 중종을 등극시킨 반정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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